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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역사상 최초의 다크호스 대통령으로 불리는 이 가 있으니 바로 미국의 제11대 대통령 제임스 녹스
포크 대통령입니다.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진 않지만 미국 역사에선 엄청난 업적을 세웠다고 합니다.
과연 그는 어떤 업적을 세웠으며 왜 다크호스로 불리게 됐는지 미국의 제11대 대통령 제임스 녹스 포크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제임스 K. 포크 (James K. Polk)

 

 

 

항목 내용
제임스의 출생 1795년 11월 2일, 미국 노스캘롤라이나 파인빌.
제임스의 사망 1849년 6월 15일, 미국 테네시주 내슈빌.
대통령 재임 기간 1845년 ~ 1849년 , 미국의 제 11대 대통령.
주요 업적 멕시코와의 전쟁으로 영토를 넓힌것.
후대의 평가 영토를 넓힌것은 대단하지만, 미국의 도덕성의 흠집을 낸 사람.

 

 

 

 

 

 

 

 

 

제임스의 어린시절

1795년 11월 2일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 파인빌 근처에 있는 농장에 살던 아버지 사무엘 포크와
어머니 제인 록스 포크 사이에서 10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난 제임스 녹스 포크 제임스 내 집안은 오래전
아일랜드에서 미국으로 이주해 온 집안으로 아버지 사무엘은 성공한 농부이자 토지 측량사였기 때문에 가정
환경은 부유한 편이었다고 합니다. 어린 시절 제임스는 키가 작고 자주 몸이 아픈 허약한 아이였습니다. 그 때문에
어린 시절엔 정식 교육을 받지 못했으며 집에서 부모님이나 가정교사에게 읽기나 쓰기 수학 등을 배웠다고 합니다.

 

아버지의 성공과 대학.

몸이 약해 학교도 제대로 다닐 수 없었지만 그래도 제임스는 동생들과 함께 말을 타고 사냥을 하고 총을 쏘는 법을
배웠다고 합니다.

그러던 1806년 제임스가 12살이 됐을 무렵 아버지는 더 큰 성공과 기회를 찾아 몇 년 전 제임스의 할아버지가 정착한 테네시주 마우리카운티로 이사를 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아버지는 농장과 측량업 거기에 부동산 투자까지 경업 하며 그 지역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들 중 하나가 되고
크게 성공을 거두게 됩니다.

어린 제임스는 시간이 날 때마다 아버지의 측량기를 돕기 위해 한창 개발 붐이 불고 있는 서부에 따라다녔다고 합니다.
하지만이 일이 무리가 됐던지 16살이 됐을 무렵 제임스는 심한 요로결석을 앓게 됩니다.

그런데 당시만 해도 제대로 된 마취제도 없던 상황이라 제임스는 마취도 하지 않고 브랜드를 마시고 생으로 수술을 하게
됐다고 합니다. 다행히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지만 훗날 제임스가 아이를 갖지 못한 건 이때 한 수술이 뭔가 잘못된게 아닐까라고 의심하는 사람들도 있다고 합니다. 여하튼 제임스는 건강을 회복하게 되는데 아버지는 제임스가 자신의 사업을 함께
해주길 바랐습니다.

 하지만 제임스는 학교에 다니기를 원했기 때문에 1813년 즉 근처에 있는 장로교 아카데미에 입학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1816년 22살이라는 조금 늦은 나이에 노스캐롤라이나 대학의 2학년으로 입학했습니다.
어릴 때 몸이 아파 제대로 정규교육을 받지 못했지만 워낙 총명하고 성실했던 제임스는 대학
입학 2년 만에 수석으로 졸업을 했을 뿐 아니라 학생 대표로 졸업식 연설까지 했습니다.

 

 

 

 

 

 

 

 

 

 

변호사가 되다.

1818년 제임스는 대학을 졸업한 뒤 고양 테네시주로 돌아와 한 저명한 변호사 사무실에 들어가 본격적으로
법학을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1820년 6월 테네시주 변호사 시험에 합격 정식으로 변호사 자격을
얻게 됩니다. 당시 제임스가 변호사를 하던 시기는 1819년에 있었던 심각한 경제 불황으로 인해 많은
사건들이 쏟아지던 상황이었는데 덕분에 제임스는 변호사로 성공을 거둘 수 있었습니다.

 

정치에 관심을 갖게 되다.

그렇게 그는 변호사로 자리를 잡아가며 어린 시절부터 관심이 있었던 정치에도 자연스럽게 관심을 두게 됩니다.
이 무렵 평생의 멘토가 듣는 정치적 스승 미국의 7대 대통령이 되는 앤드류 잭슨을 만나 인연을 맺는데 제임스의
아이들은 앤드류 잭슨을 앤드류 삼촌이라고 부를 정도로 가족끼리도 친하게 지냈다고 합니다.

그리고 1823년 변호사로 성공한 제임스는 이를 기반 삼아 테네 시주 화원 선거에 나가 당선되며
본격적으로 정치인의 길을 걷기 시작합니다.

사람들은 키는 작지만 언변이 뛰어난 제임스를 보고 그루터기의 나폴레옹 땅딸보
나폴레옹이라는 별명을 붙여주기도 했습니다.

1823년 테네시주 하원의원이 된 제임스는 1825년엔 미국 연방 하원에 당선이
됩니다.

연방 하원의원이 된 제임스는 당시 대통령 선거에서 자신의 멘토인 앤드류 잭슨을 꺾은 존 퀸시 애덤스 대통령의
여러 정책에 반대를 하며 앤드류 잭슨과는 더욱 긴밀한 관계를 맺게 됩니다.

 

 

 

 

 

 

 

 

 

사랑을 하다.

1822년 초 제임스는 테네시주에서 가장 유명한 가문 중 하나이자 부유한 상인의 딸 사라 차일드레스를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됩니다. 사라는 당시의 일반적인 여성들과 달리 대학교까지 졸업할 정도로 고등교육을 받은
여성이었습니다. 제임스가 사라에게 청혼을 했을 때 사라는 제임스가 주의원이 돼야 받아주겠다고 말할 정도로
주간이 확실하고 다부진 여성이었다고 합니다.

 

사랑 이야기.

그리고 실제로 제임스가 하원의원이 된 후 1824년 새해 첫날
30살의 제임스와 22살에 살아낸 결혼을 하게 됩니다.

명문 가문의 딸 사라와의 결혼으로 제임스는 사회적으로 경제적으로 더 승승장구할 수 있게 됐는데 특히 사라는 아내 역할뿐 아니라 제임스의 가장 가까운 정치적 동료로서 남편의 연설을 돕고 정책 문제에 대해 조언을 했으며 선거 캠페인에서도
적극적으로 활동을 했다고 합니다.

또 사라는 남편이 대통령이 된 후 다른 사람들에 비해 키가 작은 남편이 어디에 입장할 때 사람들이 대통령이
입장했다는 것을 잘 모를까 봐 일부러 남편이 들어올 때 헤이투더 치프를 연주하도록 했습니다. 그리고이 곡이 지금은
미국 대통령 참가로 공식채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앞서 얘기한 것처럼 10대 시절 제임스가 한 수술이 잘못된 건지 뭔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평생 둘 사이엔 아이가 생기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래도 둘은 차이가 아주 좋았고 제임스는 세상을 떠나는 순간에도 나는 세라 당신만을 영원히 사랑했소라며
아내에 대한 사랑을 표현했다고 합니다.

 

 

 

 

대통령이 되기 위한 발판

1828년 앤드류 잭슨이 다시 대선에 출마했을 때 제임스는 누구보다 엔트리 잭슨의 당선을 위해 힘을 씁니다. 그리고
드디어 앤드류 잭슨은 미국의 7대 대통령의 당선이 되었습니다. 이후 1835년 제임스는 하원의장 자리에 오르게

되는데 1838년 제임스는 앤드류 잭슨의 조언을 받아 의회를 떠나 테네시주 주지사 선거에 출마했습니다. 그렇게 1839년 주지사로 갑분이 당선되며 제임스의 앞날은 계속해서 잘 풀릴 것만 같았습니다. 하지만 1841년과 1843년

주지사 선거에서 이 따라 낙선하며 제임스의 앞날에도 그림자가 드리우게 됩니다. 어느 누구도 그다음 해에 있을

대통령 선거에서 제임스가 대통령 후보가 되리라곤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1844년 대통령 선거에서 이변이 일어나게 됩니다. 사실 이때까지만 해도 전 대통령인 마틴밴 뷰런이 대통령 후보로 제임스는 부통령 후보로 거론이 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미국에서 가장 큰 정치적 이슈는 영토 확장을 둘러싼 문제였습니다. 텍사스 공화국은

멕시코로부터 독립한 후 미국 연방에 가입하기를 원했는데 마틴 벤 부럼뿐 아니라 다른 후보들은 혹시나 이로 인해 

멕시코와 전쟁이 일어나는 것은 아닐까 걱정하며 텍사스 합병에 대해 조심스러운 입장을 취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제임스는 영토 확장을 위해 텍사스 합병을 강하게 주장했고 엔트류 잭슨은 제임스의 주장을 적극 지원하며 결국

대통령 후보를 뽑는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제임스는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로 선출이 되었습니다. 바로 이 때문에 

제임스는 최초의 다크호스 후보로 불려지게 된 것입니다. 실제로 주지사 선거에서도 두 번이나 떨어진 제임스가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까지 될 수 있었던 것은 앤드류 잭슨의 호강이 없었다면 절대 불가능한 일이라고 평가받기도

합니다.이렇게 제임스가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가 되자 정적인 희귀당에서는 제임스 녹스 포크는 누구인가라며

대놓고 조롱을 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제임스는 더 공격적으로 영토 확장을 하겠으며 단 한 번의 인기만

채우겠다는 공약을 내세우며 피그당의 건물 헨리 클레이를 상대로 개선해서 승리하게 됩니다.

그렇게 제임스는 미국의 제11대 대통령이 됩니다.

 

대통령으로서의 활약.

1845년 3월 4일 대통령의 취임한 제임스 녹스 포크 대통령직에 오른 최초이자 유일한 하원의장이었으며 당시
나이 51세로 최연소 미국 대통령으로도 이름을 올리게 됩니다.

제임스의 취임식은 최초로 전부로 보도되기도 했으며 신문사파에도 처음으로 소개되기도 했습니다.
50대의 젊은 대통령 제임스는 자신이 내세운 공략들을 하나하나 무서운 속도로 실현시켜 나갔습니다.

1846년 제일 먼저 독립재무 시스템을 복원시켰으며 오리건 영토의 소유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영국을 압박하여 오리건 조약의 서명하며 북이 49도 지금의 미국과 캐나다의 국경을 확정짓게 됩니다. 그리고 1845년 텍사스가 미국 연방에 가입한 후
제임스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캘리포니아와 뉴멕시코를 인수하기 위해 의회의 멕시코 침공에 대한 지원을 요청하고
승인을 받아내기도 했습니다.

참고로 바로 이때 제6대 대통령인 존켄시 애덤스는 고함까지 질러대며 멕시코 전쟁을 반대하다 뇌졸중으로 쓰러져 사망하게
됩니다. 일부 사람들의 격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1848년 제임스는 멕시코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그 결과 미국은 멕시코에게 
달랑 1500만 달러를 주고 캘리포니아와 뉴멕시코의 막대한 영토를 헐값에 넘겨받을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이로 인해 미국은 
캘리포니아 네바다 유타 애리조나 뉴멕시코 등 오늘날 미국 영토의 1/4에 달하는 지역을 빼앗아 영토를 확장했습니다. 
그런데 1848년에 있었던 선거에서 정적인 휘그당은 영토를 늘리기 위해 전쟁을 불사한 제임스를 공격했는데 
반전으로  점수에 힘입어 휘그당 의원들이 대거 당선되면서 여소야대의 하원이 등장하게 됩니다.

바로 이때 당선된 인물들 중에는 에이브러햄 링컨도 있었다고 합니다. 제임스는 자신의 제임기간 동안 영토를
어마무시하게 늘리고 최초의 우표를 발행하고 미국 해군사관학교를 세우기도 했는데 놀라운 것은이 모든 일을 4년의 임기
동안 모두 해냈다는 것입니다. 제임스 포크 행정부의 국무장관이자 훗날 15대 대통령이 되는 제임스 뷰캐넌은 그는 내가 아는 사람 중에 가장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었다 이를 열심히 한 나머지 4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너무 많이 늙은 사람처럼 보였다고
할 정도로 제임스는 퇴임 무렵 머리가 백발이 다 되었다고 합니다.

첫 번째 임기가 끝날 무렵 제임스는 단 한 번만 임기를 채우겠다는 자신의 공약을 지키며 재선에 도전하기를
거부했습니다. 그렇게 1849년 3월 그는 대통령 임기를 마치게 됩니다.

 

 

 

 

 

총정리

제임스는 현재 미국 국토 대부분을 완성한 대통령이자 미국이 태평양까지 진출할 수 있게 만듦으로써 초강대국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기반을 만들어낸 대통령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멕시코 입장에선 철천지 원수이자 폭력에 의한
영토 확장으로 미국의 도덕성에 큰 흠집을 남긴 대통령이기도 하며 또 그 과정에서 복부와 남부 사이에 갈등을 한층 더
심화시킨 대통령으로도 이름을 남기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하나 분명한 건 대통령 선거 당시 자신이 내세운 공략들을
단 4년 만에 거의 실현시킨 놀라운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미국 제11대 대통령 제임스 녹스 포크에 대해 알아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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