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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미국 최초의 순수한 미국 태생의 대통령이자, 술집을 운영하던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미국의 대통령이 되기까지 뛰어난 정치적 수완을 보여준 미국의 제8대 대통령 마틴 밴 뷰런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마틴 밴 뷰런( Martin Van Buren )

 

 

 

항목 내용
마틴의 출생 1782년 12월 5일, 미국 뉴욕 식민지 킨더후크.
마틴의 사망 1862년 7월 24일, 미국 뉴욕주 린더널드.
마틴의 대통령 재임기간 1837년 3월 4일 ~ 1841년 3월 4일, 미국의 제 8대 대통령.
마틴의 업적 1839년 메인주와 캐나다 뉴브런즈윅주 사이에서 국경선 분쟁이 일어나자
마틴이 전쟁 없이 분쟁이 해결될 수 있도록 한 것.
후대의 평가 대공황때의 미숙한 대처로 많은 비판을 받음.

 

 

 

 

 

 

 

 

 

마틴의 어린 시절

1782년 12월 5일 미국 뉴욕주 킨더훅에 살던 아버지 에이브러햄 밴 뷰런과 어머니 마리아 호이스 밴 뷰런 사이에서 태어난 마틴 밴 뷰런 마틴의 부모는 모두 네덜란드 출신의 이민자였는데 당시 그가 태어난 킨더훅은 네덜란드인

공동체 지역이었습니다. 아버지 에이브러햄 밴 뷰런은 농부이자 선술집을 운영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어린 시절 마틴은 마을에 있던 학교를 다니며 시간이 날 때마다 아버지의 가게에서 일을 도왔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며 교류하는 법을 배웠고 이는 훗날 자신의 정치적 자산으로 작용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어린 시절 마틴의 별명은 '리틀 밴'으로 사실 그는 나중에 성인이 돼서도 키가 168cm 정도로

작은 편에 속했다고 합니다.

 

성장의 과정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않았던 형편에 대학에 갈 수 없었던 마틴은 대신 15살 때부터 그 지역에서 유명한 변호사 밑에서
법률 공부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16살 무렵 처음으로 법원 재판에 참석하게 됐다고 합니다. 이후 1801년 스무 살이 된 마틴은 뉴욕 시내로 나가서
법률 사무원이 되어 법률 수습 과정을 거치게 됩니다.

그리고 1803년 마침내 마틴은 22살의 나이에 변호사 자격을 취득했습니다. 정식 변호사가 된 뒤 다시 고향 킨더훅으로
돌아온 그는 이복형과 함께 법률 사무소를 열었습니다
마틴은 어려서부터 말을 잘하기로 유명했는데 변호 능력도 좋았던지 변호사로 금방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그는 오래전부터 관심을 두었던 정치에도 꾸준히 참여하는 모습을 보이게 됩니다. 1808년
마틴은 더 나은 기반을 찾아 뉴욕의 허드슨 근처로 이사를 갔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더욱 변호사로 이름을 날리며 엄청난 돈을 벌게 되었습니다.

 

 

 

 

 

 

 

 

 

 

정치에 들어서다.

뉴욕으로 이사 온 후 변호사로 완전히 기반을 잡은 마틴은 그 성공을 기반으로 뉴욕 정치계에도 입문하게 됩니다.
평소 토머스 제퍼슨을 좋아했던 그는 민주공화당에 입당하고 뉴욕의 정치단체인 '알바니리젠시'를 이끌며
선거에서 표를 모으는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그리고 1812년엔 뉴욕주 상원의원에 출마해 당선이 되고
1815년엔 뉴욕의 검찰 총장이 되는 등 승승장구 출세 가도를 달리게 됩니다. 그 후 뉴욕의 법무장관으로 

임명되기도 했으며 1821년에는 연방 상원의원이 되어 7년 동안 자리를 지켰습니다.

 

정치가로서의 성장

이 시기 그는 자신의 정치적 멘토인 앤드류 잭슨을 만나 끈끈한 사이로 발전을 하게 됩니다.
그러던 1824년 미국 제6대 대통령 선거 당시 마틴이 지지했던 앤드류 잭슨은 첫 투표 때 1위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과반이 넘지 못해 결국 의회에서 2차 투표를 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존 퀸시 에덤스가 헨리 클레이와 손을 잡는 바람에 앤드류는 낙선 아닌 낙선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마틴은 강력한 선거 조직의 필요성을 느끼고 자신이 중심이 되어 파벌을 만들게 됩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앤드류 잭슨을 지지하는 세력들은 민주당으로 반 앤드류 잭슨 파들은 지금의 공화당의 전신이 되는
'휘그당'을 결성하게 됩니다. 미국의 양당정치는 바로 이때부터 자리를 잡게 된 것이라고 합니다.

마틴은 앤드류를 도와 민주당을 설계한 주축 인물이었던 겁니다. 1828년 앤드류 잭슨이 다시 대권에 도전하자
마틴은 자신의 고향인 뉴욕주에서 승리할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 상원의원직을 사임하고 뉴욕 주지사 선거에 출마해
 당선이 됩니다.

그렇게 앤드류 잭슨이 미국 제7대 대통령에 당선이 되면서 앤드류는 마틴을 국무장관으로 임명했습니다.
그래서 마틴은 뉴욕 주지사를 바로 사임을 하고 국무장관의 자리에 오르게 되는데 그가 뉴욕 주지사로 재임한 기간은
고작 43일 정도라고 합니다. 이는 역대 뉴욕 주지사 중 가장 짧은 임기 기간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국무장관이 된 마틴은 외교정책의 협상가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습니다. 나폴레옹 전쟁 중 프랑스와 덴마크 군함에 의해 
손상된 미국 선박과 관련된
오랜 청구권을 해결했으며 당시 압류된 재산에 대한 배상을 얻어내기도 했습니다.
또 오스만 제국과 조약을 맺어 미국 상인들이 자유롭게 왕래가 가능하게도 만들었습니다. 그러면서 마틴은 어느새 앤드류의 후계자로 지목이 됩니다. 하지만 사실 처음부터 마틴이 차기 대권 주자로 물망에 오른 것은 아닙니다.  처음엔 부통령을 지낸 
존 C. 칼훈이 다음 주자로 지목되었습니다.

 

 

 

 

 

 

 

 

 

 

대통령이 되다.

그러다 앤드류가 취임한 직후 앤드류의 친구인 이튼을 육군 장관에 임명한 것이 논란이 되며 존 C. 칼훈과는 

갈등을 일으키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칼훈이 추천해 꾸린 내각 인사들 역시 번번이 앤드류와 불화를 일으키고

말았습니다. 그러면서 내각과 민주당 역시 양쪽으로 쪼개져 큰 혼란을 겪게 됩니다. 이때 마틴은 앤드류에게

한 가지 묘안을 제시했습니다. 바로 자신과 육군 장관이 동반 사퇴할 테니 칼훈 측 인사들도 각료직에서 사퇴하라는

제안을 한 것입니다. 덕분에 1831년 앤드류 잭슨 대통령은 새로 내각을 꾸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런 마틴의 정치적 수완을 보고 지지자들은 그를 작은 마술사라고 부르기 시작했고 정적들은 킨더훅의 붉은여우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여하튼 앤드류는 이런 마틴의 공을 높이 사 이번엔 그를 대영제국의 장관으로 임명할 생각이었습니다.
하지만 상원의장으로 있던 칼훈은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마틴의 주영공사 임명안을 부결시켜 버렸습니다.
그러던 1832년 앤드류는 재선을 위해 다시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는데 이때 마틴을 러닝메이트로 선택했습니다.
그렇게 두 사람이 선거에서 승리하게 되면서 마틴은 앤드류 잭슨 정부의 부통령이 될 수 있었습니다.
이후 1835년 앤드류의 두 번째 대통령 임기가 끝날 무렵 민주당원들은 만장일치로 마틴을 대통령 후보로 지명하게

됩니다. 1836년 앤드류의 지지를 등에 업고 마틴은 대통령 선거에 나가 마침내 미국 제8대 대통령으로 당선이 됩니다.
1837년 3월에 취임한 그의 나이는 56세로 마틴은 당시 최연소 대통령이 되는 기록을 달성하기도 했습니다.

 

주요 주제1 정리 및, 추가 내용

마틴은 취임 연설에서 혁명 이후 미국 태생의 대통령으로는 자신이 처음이라며
미국이 더 좋은 시대를 앞두고 있다고 자신 있게 말했습니다.

하지만 그로부터 얼마 후 큰 위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그가 대통령이 된 지 67일 만인 1837년 5월 10일
미국 역사상 첫 공황인 '1837년 공황'이 발생한 것입니다. 이 공황은 1930년대 세계 대공황이 일어나기 전까지
사상 최악의 대공황으로 꼽히고 있었는데 사실 정확히 따지면 전 정부에서 벌여놓은 일이었습니다.

연방은행을 강력히 반대했던 앤드류 잭슨으로 인해 제2의 중앙은행 설립이 좌절되었고
일부 주립 은행들은 아무런 제약 없이 화폐를 발행하며 대출을 해주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무차별적인 땅 투기가 일어나고 결국 인플레이션까지 발생하게 된 것입니다.
앤드류는 과열된 투기를 잡기 위해 1836년 7월 국유지를 금이나 은으로만 살 수 있다는 조치를 취했는데
그러면서 잔뜩 부풀어 있었던 거품이 확 꺼지기 시작했습니다.

게다가 농산물의 수확 감소, 무역 적자 등의 경기 침체가 이어진 데다 영국에 닥친 금융위기로 인해
미국에 투자됐던 영국의 자본이 한꺼번에 빠져나가며 은행들이 줄줄이 파산하게 됩니다.

그렇게 1837년부터 1845년까지 마틴의 임기가 끝나서도 지속된 불황으로 인해 900개 이상의 은행이 문을 닫았고
많은 사람들이 실직해 거리로 나앉아야 했습니다.
마틴은 이를 타개하기 위해 독립 재무부의 설립을 추진하는 등 여러 가지 정책을 내놓았지만
그의 경제 정책은 오히려 경기 침체를 악화시키고 장기화시키는 결과만 불러오게 됩니다.

여기에 노예제로 인한 갈등이 갈수록 커지는 바람에 마틴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애매한 자세를 취하며
그의 인기는 점점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한편 멕시코로부터 독립한 텍사스는 연방 가입을 신청하게 됩니다. 그런데 혹시나 이로 인해 멕시코와 영토분쟁에 휘말리게 되진 않을지 텍사스가 노예주가 될 텐데 그로 인해 갈등이 커지진 않을지 이런저런 고민하던 마틴은 결국 텍사스의 연방 
가입을 거부해버렸습니다.

이런 그의 모습은 국민들에겐 우유부단하게만 비쳤고 지지율은 곤두박질치게 됩니다.
물론 마틴이 잘했다고 평가받는 일도 있었습니다.

1839년 메인주와 캐나다 뉴브런즈윅주 사이에서 국경선 분쟁이 일어나자
마틴이 전쟁 없이 분쟁이 해결될 수 있도록 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기 내내 '무능하고 우유부단한 정권'이란 비판에 시달리던 마틴은 1840년 11월
재선을 위한 대통령 선거에서 윌리엄 헨리 해리슨은 앞세운 휘그당에 패배하며
결국 대통령 자리에서 물러나게 됩니다.

 

 

 

 

 

 

 

총정리

대통령이 되자마자 터진 공황으로 인해
업적은 없고 악재만 많았던 불운의 대통령 마틴 밴 뷰런
하지만 그는 미국 최초로 당내 계파를 만들고
이를 활용해 정권을 창출할 정도로 뛰어난 정치 수완을 보여주었습니다.
또한 현대적인 선거 캠페인 전략을 수립하는 등
미국의 정치 체제 발전에도 큰 기여를 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일인자보다는 이인자의 자리에서 더 빛났던
미국의 제8대 대통령 마틴 밴 뷰런에 대해 알아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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