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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9대 대통령인 윌리엄 헨리 해리슨이 취임한 지 한 달 만에 갑자기 세상을 떠나게 되며
그 빈자리를 차지하게 된 이가 있습니다. 바로 윌리엄의 러닝메이트였던 부통령 존 타일러입니다.
미국 역사상 최초로 대통령의 임기 중 사망으로 인해 부통령에서 대통령이 된 첫 번째 주인공
그리고 또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탄핵에 소추된 대통령 미국의 제10대 대통령 존 타일러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항목 | 내용 | |||||
존의 출생 | 1790년 3월 29일, 미국 버지니아주 그린 웨이. | |||||
존의 사망 | 1862년 1월 28일 , 아메리카 연합국 버지니아주 리치먼드. | |||||
존의 대통령 재임 기간 | 1841년 4월 4일~ 1845년 3월 4일. | |||||
후대의 평가 | 제 4차 항목과 관련된 주요 내용을 정리하여 쉽게 나타낸 글 | |||||
존의 업적 | 제 5차 항목과 관련된 주요 내용을 정리하여 쉽게 나타낸 글 |
존의 어린 시절.
1790년 3월 29일 미국 버지니아주 찰스 시티 카운티에 살던 부유한 농장주인 아버지 존 타일러 시니어와
어머니 메리 아미스테드 사이에서 태어난 존 타일러 아버지 존 1세는 버지니아에서 이름난 정치인으로
미국의 제3대 대통령인 토머스 제퍼슨과는 대학 시절 룸메이트로 지낸 뒤 아주 절친한 사이가 되었다고 합니다.
아버지 존 1세는 큰 농장을 경영하고 많은 흑인 노예들을 거느렸을 뿐 아니라 판사, 하원의원 등 다양한 직책을
역임하고 나중에 버지니아의 주지사를 지내기도 했습니다. 잘 나가는 명문 가문에서 태어난 존은 덕분에 7명의 형제들과 함께 당대 최고의 교육을 받으며 자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어렸을 때부터 몸이 허약했던 존은 늘 감기와 설사를 몸에 달고 살았다고 합니다. 그러다 1796년 존이 7살이 됐을 때 어머니가 뇌졸중으로 갑자기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하지만 어린 존은 계속해서 열심히 공부를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시간이 날 땐 바이올린 연주와 사냥을 즐기기도
했습니다.
학교를 졸업하고 변호사가 되다.
12살이 되자 가문의 전통에 따라 윌리엄 앤 메리 대학의 예비 학교에 다니게 되는데
1807년 18살에 나이로 법학 학위를 받아 졸업을 하게 됩니다.
1808년 존의 아버지는 버지니아의 주지사로 당선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존은 아버지와 함께 리치먼드로 이사를 가게 되는데 대학 졸업 후 아버지와 변호사로 있던 사촌 밑에서
본격적으로 법학 공부하기 시작한 존은 1809년에 이르러 버지니아주 변호사 자격증을 취득하며
정식 변호사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존은 미국 최초의 법무장관인 에드먼드 랜돌프가 이끄는 로펌에도 입사를 하게 됩니다.
정계에 입문하다.
존은 변호사로 활동하면서도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를 따라 자연스럽게 정치에 관심을 가졌는데
1811년 22살의 젊은 나이에 주지사였던 아버지의 도움으로 버지니아주의 하원 선거에 나가
당선이 되며 드디어 정치에도 발을 들이게 됩니다. 하원의원이 된 존은 평상시 연방 은행 설립을 반대하던
자신의 철학에 따라 은행을 지지하는 의원들을 비판하는 캠페인을 주도하며
자신의 이름을 조금씩 알리게 됩니다.
정치계에서 성장하는 존
그러던 1812년 미영 전쟁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때 존은 하원 연설에서 미국의 군사 행동에 대한 지지를 표명했습니다.
1813년 영국이 버지니아주 햄프턴을 점령하자 존은 영국의 침공으로부터 리치먼드를 지키기 위해
찰스 시티 라이플이라는 소규모 민병대가 제대로 조직될 수 있도록 앞장섰다고 합니다.
하지만 다행히 영국은 리치몬드까진 공격을 해오지 않았고 민병대는 곧 해산을 하게 됩니다.
그러던 와중 1813년 존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게 되며 존은 막대한 재산과 노예를 상속받게 됩니다.
그런데 미영 전쟁 이후 사람들 사이 더 많은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미국이라는 새로운 나라가 더 부강해지기 위해서는
강력한 중앙 정부를 중심으로 나라가 움직여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늘어난 것입니다.
하지만 존은 대부분의 남부 농장주들과 마찬가지로 연방 정부가 강해질수록 자신의 경제적 권력 기반과
버지니아의 사회 구조에 위협이 된다고 생각하고 연방 정부보다는 주의 권리가 우선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다.
1813년 존은 자신의 24번째 생일날 부유한 농장주인 로버츠 크리스찬 대령의 딸
레티샤 크리스찬과 결혼을 하게 됩니다. 사실 둘은 오래된 연인이었는데 존이 법대생으로 있던 시절 만나
무려 5년의 연애 기간을 가진 사이였다고 합니다. 아내 레티샤는 내성적이고 조용한 성격으로
바깥일에 관심을 두기보다는 농장이나 집안일에 관심을 둔 전형적인 현모양처 스타일이었습니다.
남편이 사회적으로 정치적으로 승승장구할 때도 버지니아에서 주로 지내며 워싱턴을 거의 방문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다 존이 대통령이 되고 얼마 후인 1842년 9월 10일 레티샤는 백악관에서 뇌졸중으로 갑자기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이는 백악관에서 사망한 최초의 영부인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레티샤가 세상을 떠나고 2년 후인 1844년
존은 백악관에서 자신보다 30살이나 적은 25의 줄리아 가드너와 재혼을 하게 됩니다.
여러 일이 엉켜있다 풀리게 되다.
그때 존의 나이 무려 55살 존은 어린 신부의 환심을 사기 위해 초호화 결혼식을 올렸는데 이로 인해 많은 사람들의 비웃음을 샀고
임기 막판까지 잡음에 시달렸다고 합니다.
어쨌든 존은 두 명의 영부인을 둔 최초의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다행히 두 번의 결혼 생활 모두 아내와 사이가 무척 좋았다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첫 번째 결혼에선 아이가 8명, 두 번째 결혼에선 7명 총 15명의 자녀를 얻어 역대 미국 대통령 중 가장 많은 자식을 둔 대통령으로도 이름을 올리게 됩니다.
레티샤와 결혼 후 변호사로 지내던 존은 1816년 9월 버지니아 의회에서 한 하원의원이 사망하여 공석이 생기자
하원의원 선거에 도전하며 다시 정치인의 길에 걷게 됩니다.
이후 그는 1821년까지 버지니아 하원의원으로 지내며 평소 자신의 철학과 이념대로
연방 정부의 권력을 넓혀가는 정책을 반대해 나가는 데 앞장섰습니다.
1820년 미주리주 연방에 가입시켜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가지고 논쟁을 벌이다 미주리는 메인주와 함께 연방에 추가될 것이며
노예제는 미주리에서 승인하는 대신 메인에서는 금지시킨다는 미주리주 타협안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이때 존은 노예제를 승인하느냐 마느냐는 각 주가 정할 권리라며 연방 정부가 노예제를 이래라저래라 할 수 없다고
타협안에 대해 반기를 듭니다.
그런데 결국 자신의 뜻과는 달리 미주리주 타협안이 통과되자 이에 낙담한 존은 1820년 말 건강이 좋지 않다는 이유로 하원직을 사임한 뒤 다시 변호사로 살아가게 됩니다. 하지만 존은 변호사 일보다는 정치가 적성에 더 맞았습니다. 그래서 2년간의 공백을 거친 후 1823년 다시 선거에 나가 하원으로 당선되며 또다시 정치인으로 컴백하게 됩니다.
대통령이 되기까지의 기나긴 여정.
이후 그는 1825년엔 버지니아의 주지사로 1827년엔 미국 상원의원으로 활발히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그러던 1828년 재선을 노리는 존 퀀시 애덤스와 전쟁 영웅 앤드류 잭슨이 대통령 자리를 놓고 다시 맞붙게 됩니다.
사실 존은 연방 정부의 권력을 강화하려는 두 후보를 모두 좋아하진 않았습니다. 둘 중 누가 자신에게 더 도움이 될지 고민하던 존은
1824년 대선에선 존 퀀시 애덤스를 1828년 대선에선 앤드류 잭슨을 각각 지지하게 됐는데 존은 역시나 그들과는 자신의 신념이
다르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결국 그는 오랫동안 몸담았던 민주당에서 탈퇴하고 헨리 클레이와 다니엘 웹스터가 새로 설립한 휘그당에 입당했습니다. 그러면서 존은 1836년까지 미국 상원으로 지내며 앤드류 잭슨 대통령의 여러 정책들에 대해 반대를
하고 나섰다고 합니다. 1840년 휘그당은 윌리엄 헨리 해리슨을 대통령 후보로 내세우고 또 동시에 남부 사람들의 표를 끌어모을
생각으로 존 타일러를 부통령으로 내세우게 됩니다. 그리고 바로 이때 지난 영상에서 언급한 티퍼카누와 타일로도라는 유명한
정치 슬로건이 탄생하게 됩니다. 선거 결과 두 사람은 경제 공황으로 인해 지지율이 추락한 마틴 밴 뷰런 대통령을 쉽게 제압하며
윌리엄 헨리 해리슨은 미국의 9대 대통령으로 존 타일러는 부통령이 되는데 성공했습니다. 그런데 윌리엄 헨리 해리슨이 대통령이 된 지 겨우 한 달 만에 폐렴에 걸려 갑자기 세상을 떠나게 되며 대통령 자리는 공석 상태가 됩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미국 헌법엔
대통령이 재임 중 사망할 경우 부대통령이 대통령직을 승계할 것인지 아니면 부대통령으로 대통령의 권한 대행을 하는 것인지
대통령 승계에 관한 구체적인 절차가 없었던 상황이었습니다.
대통령이 되다.
이런 상황 속에서 1841년 4월 6일 윌리엄 헨리 해리슨 대통령이 사망한 지 이틀 뒤 존은 대통령에 취임하며 미국의 제10대 대통령이 됩니다. 대통령이 사망하면 부통령이 대통령이 된다는 것을 스스로 보여준 것입니다.
그리고 존의 이러한 행보는 전임 대통령이 사망하게 되면 부통령이 대통령 대행이 아닌 대통령이 된다는 선례를 남겼습니다.
그리고 이는 1967년 미국 헌법 수정 제25조에 성문화되며 법적으로 인정을 받게 됩니다.
참고로 전임 대통령인 윌리엄 헨리 해리슨은 69세로 그 당시 최고령 대통령으로 기록을 남겼는데 존은 그 당시 52세로 최연소
대통령으로 이름을 올리게 됩니다. 존이 취임사를 발표할 때까지만 해도 휘그당은 자신들이 밀어준 존이 자신들의 정책을
반영시켜줄 대통령이 되리라 믿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휘그당의 수장인 헨리 클레이는 존이 대통령이 되자마자 휘그당의 노선이었던 미합중국 은행을 부활시키려는 법안을
의회에 통과시키게 됩니다. 하지만 존은 헨리 클레이가 제출한 법안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해 버렸습니다.
이후 다시 헨리 클레이에 의해 비슷한 은행 관련 법안이 의회를 통과하게 됐지만 존은 이번에도 역시 주 자치권 보호를 명분으로
다시 한번 거부권을 발동하게 됩니다.
그러자 국무장관을 제외한 모든 국무위원이 내각에서 총사퇴하는 초강수를 보이게 되고 존은 휘그당에서 공식적으로
추방당하게 됩니다. 한마디로 당이 없는 무소속 대통령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1년 후 존이 관세 관련 법안에 대해 다시 한번
거부권을 행사하자 존 퀸시 애덤스 전 대통령이 위원장을 맡은 특별위원회는 대통령이 거부권을 남용했다는 이유로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대통령에 대한 탄핵 소추를 하게 됩니다.
탄핵안이 통과되지는 못했기 때문에 존은 대통령의 자리를 지킬 수 있었지만 이렇게 여당으로부터도 야당으로부터도
환영을 받지 못한 대통령이 된 존 타일러 그럼에도 불구하고 존은 몇 가지 큰 성과를 거두기도 했습니다.
해군을 재편성하고 미국 기상국을 설립했으며 제2차 세미놀 전쟁을 끝내기도 한 것입니다.
또 1844년엔 청국 청나라와 왕샤 조약을 맺어 미국인들이 중국에서 무역을 할 수 있도록 도왔으며 임기가 끝나기 직전엔
텍사스의 합병을 승인하고 플로리다를 연방의 일부로 만들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임기가 끝나갈 무렵인 1844년
다음 대통령을 위한 선거가 치러지게 되자 존은 민주당도 휘그당도 아닌 제3당 후보로 다시 대선에 나가볼까 잠시 고민을
하기도 했지만 결국 지지 부족을 중도에서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대통령에서 퇴임한 후 존은 가족들과 함께 버지니아 자신의 농장으로 내려갑니다. 그는 농장에 있던 숲의 이름을 셔우드
숲으로 바꾸게 되는데 자신을 지켜주는 당도 없이 정치적 무법자로 살았던 자신이 전설의 의적 로빈 후드를 닮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1860년 에이브러햄 링컨이 대통령에 당선이 되면서 미국은 노예제 문제로 남부와 북부로 나뉘어
전쟁을 피할 수 없는 상황이 되고 맙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존은 연방에서 남부가 탈퇴하는 것을 반대하며
연방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해 왔는데 1861년 초 그는 워싱턴 디씨에서 평화 회의를 주재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남부와 북부는 결국 합의를 보지 못했고 존은 연방에서 버지니아를 비롯한 남부 주들이 연방에서 탈퇴하는 것을
지지하게 됩니다. 그리고 1861년 11월 존은 남부동맹 하원 의장으로 선출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자리에 한 번 앉아보지도 못하고
1862년 1월 12일 평생 건강이 좋지 않았던 존은 73세의 일기를 끝으로 눈을 감게 됩니다. 존 타일러는 워싱턴에서 공식적으로
대통령의 죽음을 표명하지 않은 미국 역사상 유일한 대통령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가 남북전쟁 중 연방을 거부하고 남부 동맹군의 후원자로서 세상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의 장례식에는
미국의 국기가 아닌 남부 연합의 국기가 사용됐으며 남부 연합기와 묻힌 유일한 대통령으로 남아 있다고 합니다.
존 타일러는 어떤 대통령이었는지를 두고 학계나 정치 평론가들 사이에선 평이 갈리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미국인들에겐 별 임팩트는 없다고 합니다.
총정리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하루아침에 부통령에서 대통령이 되었지만 크게 존재감은 없었던 대통령
연방보다 고향 버지니아와 자신의 원칙에 더 충실했던 대통령
지금까지 미국의 제10대 대통령 존 타일러에 대해 알아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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