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미국은 바이든 대통령까지 총 46명의 대통령을 배출해오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역대 미국 대통령 중
가장 짧은 재임 기간을 기록한 대통령은 누구일까? 대통령이 된 지 한 달 만에 사망한 불운의 대통령이자
미국 독립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태어난 마지막 대통령 바로 제9대 대통령 윌리엄 헨리 해리슨입니다.
그는 자신의 손자가 대통령이 되며 미국 역사상 유일한 조손 대통령의 기록을 가지고 있기도 합니다.
오늘은 이런 특별한 사연을 가진 미국 제9대 대통령 윌리엄 헨리 해리슨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윌리엄 헨리 해리슨 ( William Henry Harrison )

 

 

 

항목 내용
윌리엄의 출생 1773년 2월 9일, 대영 재국 버지니아주 찰스시타군.
윌리엄의 사망 1841년 4월 4일, 미국 워싱턴 D.C.
대통령 재임기간 1841년 3월 4일 ~ 1841년 4월 4일.
대표 타이틀 역사상 가장 짧은 기간 동안 대통령을 한 사람.
후대의 평가 제 5차 항목과 관련된 주요 내용을 정리하여 쉽게 나타낸 글

 

 

 

 

 

 

 

 

윌리엄의 어린 시절.

미국이 영국으로부터 독립하기 전인 1773년 2월 9일 버지니아주 버클리에 살던 아버지 벤저민 해리슨과
어머니 엘리자베스 바셋 헤리슨 사이에서 3남 4녀 중 막내로 태어난 윌리엄 헨리 해리슨
그의 아버지 벤저민은 독립선언서에 서명을 하고 이름을 남긴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 중 한 명이자
하원의원과 주지사를 역임한 명망 있는 정치인이었습니다.
또 많은 노예와 대농장을 가지고 있는 부유한 집안이기도 했습니다.

 

성장하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금수저로 태어난 윌리엄 어린 시절 윌리엄은 학교에 다니는 대신
집에서 가정교사를 통해 교육을 받게 됩니다.

그러다 1787년 15살이 되던 해 버지니아에 있는 햄프턴-시드니 대학에 들어가 라틴어와 그리스어 그리고 고전과 역사 등을 공부하게 되는데 윌리엄은 특히 군사사 특히 로마의 군사사에 관심을 보였다고 합니다.
이후 1790년 18살이 된 윌리엄은 펜실베이니아대학 의과대학에 입학해 의사가 되기 위한 공부를 시작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로부터 1년 뒤인 1791년 아버지가 갑자기 병으로 세상을 떠나게 되며 윌리엄은 학비가 부족해 학교를 자퇴하고
 군 입대를 해야 했습니다.

'아니 무슨 금수저가 돈이 없다고 군 입대를 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사실 당시의 법이나 관습을 보면
재산은 대개 장남에게만 물려주고 차남들은 군대를 가거나 성직자, 사업을 해야 하는 분위기였다고 합니다.

그렇게 아버지의 재산 대부분은 큰 형에게 넘어가게 되고 윌리엄은 하던 의학 공부를 그만두기로 한 것입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막상 의학 공부를 해보니 윌리엄은 자신의 적성에 맞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합니다.
1791년 8월 윌리엄은 19살의 나이로 학교를 자퇴했습니다.

 

 

 

 

 

 

 

 

 

 

군대에 입대하다.

그리고 장교 출신으로 버지니아 주지사를 지내기도 한 아버지 친구의 추천을 받아 미합중국 육군에 입대하게 됩니다.
그런데 윌리엄이 군 복무를 하게 된 지역은 백인 정착민과 자신의 땅을 지키려는 아메리카 원주민 간의 싸움이

많았던 곳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윌리엄은 소위로 입대를 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뛰어난 활약을 보이며 금세 

중위로 진급했다고 합니다.

 

군에서의 활약. 그리고 사랑

그리고 1794년 이 전쟁 중 하나인 북서 인디언 전쟁을 종식시킨 '폴른 팀버스 전투'에 참여해 혁혁한 공을 세우며
표창까지 받게 됩니다.

이때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그린빌 조약'을 통해 오하이오의 대부분의 땅을 미합중국에 뺏기게 됐는데
윌리엄은 이 그린빌 조약의 서명자로도 참여를 했다고 합니다.

이후 윌리엄은 1797년 5월 대위로 승진한 후 1798년 6월 육군에서 제대를 하게 됩니다.
1795년 한창 군 복무 중이던 23살의 윌리엄은 21살의 부잣집 딸 애나 사이메스를 만나 사랑에 빠집니다.

애나의 아버지 존 사이메스는 독립 전쟁에서 대령과 연방 의회 대표를 지낸 판사로 애나네 집은 돈과 명예를 다 가진 
집안이었습니다. 그런데 둘의 사랑엔 큰 장애물이 있었으니 바로 애나의 아버지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딸이 군인의 아내가 되어 힘든 삶을 사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에 둘의 교제를 극구 반대하고 나섰다고 합니다.
결국 둘의 찐 사랑에 아버지도 두 손 두 발 다 들게 됐고 윌리엄을 사위로 받아들였다고 합니다. 둘은 결혼 후에도 사이가 
좋았던지 10명의 자녀를 갖게 됐는데 안타깝게도 이 중 6명은 윌리엄이 대통령이 되기 전 일찍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그중 아들 존 스콧 해리슨은 훗날 오하이오주에서 미국 하원의원이 되고 다시 그의 아들 그러니까 손자 벤저민 해리슨은
미국의 23대 대통령이 되어 윌리엄은 미국 역사상 유일무이한 조손 대통령으로 이름을 올리게 됐다고 합니다.
아내 애나는 여러 번의 임신과 출산으로 인해 건강이 그리 좋지 않았는데 그래서 남편의 대통령 취임식에도 참석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게다가 남편이 대통령이 되고 한 달 만에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애나는 영부인이 되었음에도 백악관에 입성 한번
 못했다고 합니다.
건강이 그리 좋지 않았지만 애나는 남편이 세상을 떠난 후에도 23년이나 더 오래 살게 됩니다. 윌리엄이 세상을 떠날 당시
남겨놓은 재산이 거의 없었던 관계로
애나는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대통령 미망인을 위한 연금을 수령한 영부인으로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고 합니다. 든든한 배경을 가진 애나와의 결혼은 윌리엄에게 여러모로 큰 힘이 되었습니다.

 

 

 

 

 

 

 

 

 

 

정치에 들어서다.

군인으로서의 경력과 명성을 가진 장인의 소개로 미국 제2대 대통령인 존 애덤스는 윌리엄을 노스웨스트 준주의

장관으로 임명하게 됩니다. 이후 1798년엔 윌리엄은 26세의 나이로 하원의원 선거에 출마하게 되는데
한 표 차이로 아슬아슬하게 노스웨스트 준주의 첫 번째 하원의원이 되어 간신히 정계에 발을 들이게 됩니다.

그렇게 하원의원이 된 윌리엄은 지금까지는 대규모로만 토지를 구매할 수 있었던 법을 개혁해
자금이 넉넉하지 않은 사람들도 서부의 토지를 살 수 있도록 토지를 작은 부분으로 나누어 살 수 있는 법안을 통과시키기도 합니다. 그 결과 더 많은 사람들이 토지를 구입해 서부에 정착할 수 있게 됐고
인구는 급속히 늘어날 수 있게 됐다고 합니다.

정계에서의 활약.

1800년 존 애덤스 대통령이 윌리엄을 인디애나 준주의 지사로 임명하게 되면서
윌리엄은 이후 12년 동안 이 지역을 관리하게 됩니다.

당시 인디애나 지역은 아직 독립적인 주로 인정받지 못한 준주 상태였는데 이 지역의 주지사가 된 윌리엄의 목표는
가능한 아메리카 원주민의 영토를 많이 빼앗아 미국인들을 이주시켜 성공적인 서부 개척을 완성하는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1802년-1809년 사이 윌리엄은 강압적이고 불합리한 여러 조약들을 체결해 아메리카 원주민들로부터 수백만 에이커에
 달하는 토지를 빼앗고 미시간, 인디애나, 일리노이, 위스콘신 지역의 땅들을 하나하나 차지해 나가기 시작합니다.

당시 이들이 아메리카 원주민들을 상대로 어느 정도로 말도 안 되는 조약을 맺었는가 하면
200 에이커 그러니까 약 24만 평에 달하는 땅을 달랑 1센트만 주고 사들이는 식이었다고 합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상황에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폭발하게 됐고 원주민인 쇼니족의 추장 테쿰세를 중심으로 한 봉기가 일어나게
됩니다.

아메리카 원주민 지도자인 테쿰세는 6살 때 백인들에게 아버지를 잃고 어릴 때부터 전쟁터에서 살아온 잔뼈가 굵은 전사로
원주민들의 땅을 어떤 부족이 마음대로 처분할 수 없다고 그동안 맺어진 조약은 모두 무효라고 주장하며
여러 부족들과 함께 동맹을 결성한 것입니다.

 

 

 

 

 

이후의 계속된 군생활

윌리엄은 처음엔 테쿰세의 사상에 깊은 인상을 받고 그를 천재라고 묘사하기도 했으나
그가 서부 개척에 위협이 되는 존재라는 것을 간파하고 정규군과 민병대로 군대를 꾸려 탄압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1811년 11월 7일 티피카누 전투에서 아메리카 원주민들에게 대승을 거두며
봉기가 잠시 사그라지기도 했습니다. 이날의 승리로 인해 윌리엄은
미국 전역에 자신의 이름을 알리게 됩니다.

 

군생활의 마무리

1812년 미영 전쟁이 일어나자 당시 대통령이던 제임스 매디슨은 윌리엄을 노스웨스트군의 육군 준장으로 임명하게 됩니다.
그렇게 다시 육군에 복귀한 윌리엄은 1813년 소장으로 진급하고 온타리오 남부에서 일어난 전투에서
영국-아메리카 원주민 연합군에 대승을 거뒀습니다.

이 전투 중 아메리카 원주민 지도자인 테쿰세도 전사를 하게 되고 원주민들의 저항도 끝이 나고 맙니다.
하지만 이 같은 성과에도 윌리엄은 전쟁 장관과 불화를 겪으며 미영전쟁이 끝나기도 전인 1814년
군에서 전역한 후 자신의 오하이오 농장으로 돌아가 버렸습니다.

 

 

 

 

 

 

 

 

 

 

정계의 복귀

1816년 군에서 쌓은 자신의 명성을 바탕으로 윌리엄은 하원 선거에 출마 당당히 당선되며 다시 정치인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그렇게 하원의원으로 일하며 윌리엄은 연금법이나 민병대 조직 등을 위해 일을 하고
노예제를 찬성하는 자신의 견해에 따라 노예제를 금지하는 조례를 중단하도록 의회에 로비를 하기도 합니다.
이후 그는 다시 1819년엔 주립 상원의원으로 1825년엔 미국 상원으로 1828년엔 콜롬비아 주재 미국 공사로 

승승장구하게 됩니다. 그리고 콜롬비아에서 돌아온 후 윌리엄은 거의 40년에 가까운 공직 생활을 마치고
자신의 농장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경제적으로는 수완이 그리 좋지 못했던지 윌리엄의 생활은 그리 넉넉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지지자들은 윌리엄을 해밀턴 카운티의 법원 서기로 임명해 그의 생활을 돕기도 했다고 합니다.

 

대통령이 되기까지의 과정.

그렇게 오하이오의 시골에서 조용히 살아가던 윌리엄에게 새로운 기회가 찾아오게 되니
1836년 대통령 선거에서 휘그당이 전쟁 영웅이자 개척자인 윌리엄을 대통령 후보로 내세우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선거 결과 윌리엄은 민주당의 마틴 밴 뷰런에게 패배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다시 4년 뒤 1840년 재선을 노린 마틴 밴 뷰런에 맞서 다시 휘그당의 대통령 후보로 나서게 된 
윌리엄 이때 윌리엄의 나이는 벌써 68살로 상대 진영에선 통나무집에서 사과주나 마시는 게 어울리는 고루하고 현실 감각 없는
 늙은이라고 공격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자 윌리엄 측에선 오히려 '통나무집과 거친 사과주'를 윌리엄의 이미지로 부각하는 전략을 펼쳤습니다.
귀족층이자 부유층인 윌리엄을 역으로 서민 대통령으로 포장을 시킨 것입니다.

그리고 아메리카 원주민을 상대로 명성을 쌓은 윌리엄의 군인 경력과 러닝메이트로 나선 부통령 후보 타일러의 이름을 붙여
'Tippecanoe and Tyler, Too'라는 구호를 만들어 내는데 이 슬로건은 미국 정치에서 가장 유명한 슬로건 중 
하나가 됐다고 합니다.

또 당시만 해도 여성에겐 투표권이 없었지만 남편이나 남성들의 투표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여성들을 적극적으로 선거 운동에 참여시키기도 했습니다.

 

 

 

 

계속된 선거 유세, 대통령이 되다.

더불어 선거 사상 최초로 로고송을 만들었으며 모자, 풍선, 현수막 등으로 연설장을 뒤덮고
전국을 누비며 대형 연설회를 열어 흑색선전과 폭로, 비방 등도 퍼붓게 됩니다.
참고로 윌리엄의 이 선거전을 계기로 미국의 대통령 선거는 하나의 거대한 쇼로 변질되는
양상을 보이게 됐다고 비판하는 목소리도 있습니다. 어찌 됐든 선거 결과 윌리엄은 경제 공황으로 인해 지지율이 

추락한 마틴 밴 뷰런을 상대로 234 대 60이라는 압도적 격차로 승리하며
미국의 제9대 대통령이 됩니다

 

 

 

사망하다..

대통령에 당선된 윌리엄은 취임식에 참석하기 위해 대통령 당선자 중 최초로 기차를 타고 워싱턴에 도착했습니다.
1841년 3월 4일 마차, 시민들, 군악대가 등장하는 역대 최대 규모의 취임식 퍼레이드를 이끌고
윌리엄은 자신의 백마를 타고 국회의사당에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그런데 하필 그날은 비가 내리고 바람까지 세차게 불었습니다. 나이가 많은 윌리엄의 건강을 걱정한 참모들이
취임식을 연기하는 게 어떻겠냐 제안했지만 윌리엄은 자신은 전장에서도 살아남은 사람이라며
오히려 코트나 모자도 쓰지 않고 취임식을 강행하게 됩니다.

심지어 그는 역대 미국 대통령 중 가장 긴 취임 연설을 하게 되는데 보통 다른 대통령들이 1000-2000 단어 정도를 연설문에
사용했다면 윌리엄은 무려 8500 단어를 사용해 취임 연설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일흔이 가까운 나이에 2시간 가까이 비를 맞으며 연설을 한 것이 화근이 되어 윌리엄은 감기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감기가 폐렴으로 악화되더니 결국 1841년 4월 4일 대통령에 취임한 지 31일 만에
69세의 나이로 허무하게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총정리

대통령이 되자마자 세상을 떠난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에 대통령으로서의 존재감은 거의 없지만
윌리엄은 처음으로 이미지 선거를 이용해 선출된 대통령이라는 점 그리고 미국 역사상 최초로 재직 중 사망한 대통령이자
가장 짧은 기간 재임한 대통령이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습니다. 백인들 입장에서 윌리엄은 자신들의 땅을 확장시킨
미국 역사상 가장 뛰어난 장군 중 한 명으로 기억이 되겠지만 아메리카 원주민들 입장에선 자신들의 땅을 빼앗고 생명을
앗아간 무자비한 약탈자로 기억되기도 할 것입니다. 지금까지 미국 역사상 가장 짧은 기간 대통령을 지낸
제9대 대통령 윌리엄 헨리 해리슨에 대해 알아봤습니다.

 

글 보관함
최근에 올라온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