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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역대 대통령들 중엔 임기준 갑자기 세상을 떠난 불우난 대통령들이 몇 명 있습니다.
그중 오늘 알아볼 12대 대통령 재커리 테일러 역시 임기가 시작하고 얼마 안 돼 목숨을 잃게 된 대통령입니다.
그런데 그 원인은 다름 아닌 체리 열매였습니다. 이번 영상에서는 40년 동안 군인으로 뛰어난 활약을
하며 전쟁영웅이자 국민 영웅으로 추앙받다 대통령까지 된 주인공 하지만 너무도 허무하게 세상을 떠난 미국의
제12대 대통령 재커리 테일러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항목 | 내용 | |||||
재커리의 출생 | 1784년 11월 24일, 미국 버지니아주 바버스빌. | |||||
재커리의 사망 | 1850년 7월 9일, 미국 워싱턴 D.C. | |||||
재커리의 대통령 재임기간 | 1849년 3월 4일~ 1850년 7월 9일, 미국의 제 12대 대통령. | |||||
재커리의 주요 업적 | 멕시코 전쟁에서의 활약. | |||||
후대의 평가 | 전쟁영웅이지만 빨리 죽은 비운의 인물. |
재커리의 어린 시절
1784년 11월 24일 미국 버지니아주 오렌지카운티에 살던 아버지 리처드 리테일러와 어머니 살아 다분히 테일러
사이에서 6남 3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난 재커리 테일러 아버지 리처드와 어머니 사라는 버지니아의 이름이 있는
명문가 출신으로 재커리가 태어나고 얼마 한데 가족들은 버지니아를 떠나 켄터키주 루이빌의 외곽 지역으로
이사를 가게 됩니다. 루이빌로 이사를 갔을 때는 이제 막 개발을 하고 성장을 하던 시점으로 재커리의 아버지는
농장을 더 큰 규모로 늘릴 수 있었고 흑인 노예들도 더 많이 소유할 수 있게 됐다고 합니다. 또한 재커리의 아버지
리처드는 미국 독립혁명 당시 미국 육군에서 중령으로 복무하며 미국의 독립을 위해
열심히 싸운 전교 출신이기도 했습니다.
어린 시절의 이야기.
어린 재커리는 시간이 날 때마다 아버지로부터 독립 전쟁에 대한 얘기를 들을 수 있었는데 그 때문인지
재커리는 어려서부터 군인이 되고 싶어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켄터키주는 아직 교육 시스템이 제대로 마련돼 있지 않는 관계로 재커리는
형제들과 함께 주로 집에서 가정교사에게 읽기와 쓰기 등을 배우고 중간중간
학교나 학원에 다니는 시기였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한편으론 언젠간 자신의 꿈인 군인이 되기 위해 승마나 사냥 사격 등을 배웠다고 합니다.
1806년 23살이 된 재커리는 대학에 입학하는 대신 자신의 오랜 꿈인 군인이 되기 위해 군에 입대를
했습니다. 이후 1808년 켄터키주 제7보병연대에서 중위로 근무를 하게 됩니다.
재커리가 장교로서 맡게 된 첫 번째 임무는 지금의 테네시주 멤피스에
위치한 한 요새의 수비드를 맡아 지휘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때부터 40년 동안 재커리는 국경지역의 전초기지에서 군인으로 생활을 하게 됩니다.
나만의 발판을 만들어 가다.
1809년 재커리는 뉴올리언스 지역의 황폐한 캠프에서 군생활을 했습니다. 이때 재커리를 포함한 많은 병사들은
질병과 물자 부족 등으로 큰 고통을 겪었고 재커리 역시 병을 얻어 휴가차 고향 집으로 가야 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다시 건강을 회복한 후 1810년 11월엔 대위로 진급하게 됩니다. 재커리는 이렇게 군인으로 지내면서도
자신의 재산관리에도 많은 신경을 쓰는 듯 경제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은행 주식을 대량으로 매입하거나 루이빌 근처나 미시시피 준주지역에 있는 농장 등을 사는 시기였는데 그
결과 흑인 노예수가 200명 이상으로 늘어날 정도로 재커리는 경제적으로도 큰 성공을 거두게 됩니다.
사랑을 하다.
1809년 건강을 회복하기 위해 잠시 고향에 들어온 재커리는 지인의 소개로 켄터키에 있는 여동생
집에 놀러 온 마가렛 매컬 스미스라는 여성을 소개받아 사랑에 빠지게 됩니다.
그리고 그로부터 얼마 후인 1810년 6월 21일 27살의 재커리는 23살의 마가렛과 결혼을 하게 됩니다.
마가렛의 아버지 월터스미스 소령 역시 재커리의 아버지처럼 미국 독립전쟁에
참전한 노련한 군인 출신으로 메릴랜드 주에서 큰 농장을 경영하던 분이었다고 합니다.
비슷한 가정환경에서 자란 덕분인지 재커리어와 마가렛의 결혼 생활은 순탄한 편이었습니다.
독실한 성공의 신자인 마가렛은 군인인 잴코리의 안전과 건강을 위해 자주 기도를 했으며 특히 남편이 전쟁에
참전을 하게 되면 남편이 무사히만 돌아올 수 있다면 자신의 사회적 즐거움을 기꺼이 포기하겠다며
스스로 운둔자의 생활을 택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훗날 남편 재커리가 대통령 선거에 나가게 됐을 땐 평생 군인으로 살았던 남편이 힘들 것이라고 생각했던 건지
오히려 남편의 패배를 위해 기도를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자신의 기도와 달리 결국 남편은 대통령이 되었고
재커리와 함께 워싱턴 dc로 가게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마가렛은 웬만하면 공개 석상에 나서지 않아 딸 베티가 백악관의 안주인 역할을 맡아서 했다고 합니다.
참고로 재커리와 마가렛 사이엔 1남 5녀의 자식이 있으며 이중 새 딸이 아버지처럼 군인과 결혼했고 하나밖에
없는 아들 리처드 역시 미국 남북전쟁 중 남부 동맹군의 사령관으로 복무를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의외로 재커리는 딸들이 힘들까 봐 군인과 사귀는 것을 반대했습니다. 특히 딸 사라가 훗날 미국 남부의
대통령이 될 제퍼슨 데이비스 중위와 사귈 때는 강력하게 반대를 했다고 합니다. 자신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835년 6월 딸 사라는 제퍼슨과 20대 초반의 나이에 결혼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결혼을 한지 불과 3개월 만에 사라는 말라리아에 걸려 일찍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고 합니다.
재커리가 결혼을 하고 2년 후인 1812년 미영 전쟁이 터지게 됩니다.
군대에서의 활약
재커리는 이 전쟁 중 9대 대통령인 윌리엄 헨리 해리슨과 함께 아메리카 원주민들로부터 인디애나를 지키는데
성공하고 1814년엔 존슨 유세를 점령하는 등 군인으로서 뛰어난 활약을 하게 됩니다. 이후 소령을 거쳐 1819년엔
중령으로 1820년대에는 루이지애나 준주와 텍사스 국경에 있는 포트재섭에 사령관이 되기도 했습니다.
1832년엔 대량으로 진급한 뒤 블랙호크 전쟁에 참전했으며 1837년엔 19세기에 일어난 가장 큰 미국 아메리카
원주민 전투 중 하나인 제2차 세미노 전쟁에 참전해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데 큰 공을 세우며 결국 장군으로 특별진급까지 하게 됩니다. 이렇게 재커리는 자신의 능력을 바탕으로 뛰어난 군사 지도자로 명성을 얻게 되었으며
사람들로부터 골든 라오스 앤 레디라는 별명까지 얻게 됩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재커리는 정치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태생이 군인인 사람이었습니다.
정치에 관심을 가지게 되는 사건
그런데 이런 글을 정치로 이끈 사건이 발생하게 됩니다. 바로 1845년 제임스케의 포크 대통령의 밀명이 전달된 것이었습니다.
국경을 넘어서 멕시코 군을 도발하라는 내용이었고 이렇게 해서 터진 전쟁이 1846년 멕시코 전쟁이었습니다.
재커리는 텍사스를 방어하는 데 성공할 뿐 아니라 알로 알토 레사카 대마 팔마 몬테레이 등에서 승리를 거두며
순식간에 전쟁영웅으로 부상하여 미국 국민들에게 큰 인기를 얻게 됩니다.
그러자 제임스 포크 대통령은 재커리의 인기가 더 올라갈 것을 견제해 재커리 대신 윈필드 스콧 장군에게
멕시코시티를 점령하라고 명령을 내립니다. 하지만 재커리는 대통령의 명령을 거부하고 계속 진군했다고 합니다.
결국 1847년 2월 대통령의 지원이 없는 열악한 상황에서도 부에나비스타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캘리포니아와 뉴멕시코의
점령을 확고히 하게 됩니다. 그리고 재커리는 국민적 영웅으로 떠오르게 됩니다. 사람들과 언론들은 재커리를 미국의
전쟁영웅이던 조지 워싱턴이나 앤드류 잭슨과 같이 언급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재커리도 선거에 나오는 것 아니냐는 얘기가 흘러나오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재커리는 자신은 정치에
전혀 관심이 없고 그래서 대통령 후보에도 나서지 않을 것이라고 발표를 합니다. 당시 휘그당은 전쟁의 반대하는 입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인기가 높은 재커리가 선거에서 승산이 있다고 판단하여 재커리를 여러 번 만나 설득하는데 성공을 하게 됩니다.
대통령이 되려고 하다.
그리고 1848년 피그 당의 대통령 후보를 뽑는 전당대회에 나가 휘교당의 건물 헨리 클레이를 꺾고 대통령 후보가
되는 데 성공합니다.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재커리는 정치는커녕 잠재적인 총사령관에게 투표하고 싶지 않다며
대통령 선거에 투표조차 해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혹시나 그가 휘그당에 꼭두각시가
되는 것 아니냐며 우려하는 눈길을 보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재커리는 자신은 휘그당의 후보로 출마를 하지만
자신의 신념을 당해 굽히지 않겠다고 가능하며 자신의 뜻을 밝히기도 했습니다. 오랜 세월 동안 나라를 지키는
군인으로 있었던 만큼 주의 주권을 인정한 하되 어떠한 일이 있어도 미합중국이 깨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을 하는
연방 파였으며 경제적으로 휘그당이 원했던 국가의 기반시설 확충이나 보호무역은 반대했지만 대통령은 헌법에
관련되지 않는 이상 거부권을 사용하면 안 되고 의회에 맡겨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대통령이 되다.
그리고 1848년 11월 7일 처음으로 같은 날 전국의 모든 주들에서 대통령 투표를 하게 된 그날 반 노예주의를 주장하며 다시
대통령 선거에 뛰어든 자유토지 당해 마틴 뱀 뷰런 전 대통령이 민주당의 표를 나눠 가져가는 바람에 재커리는 미국의 새로운
대통령이 되는데 성공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는 민주당이나 공화당이 아닌 다른 당으로 미국 대통령의 선출된 마지막 주인공으로 기록을 남기게 됩니다.
그렇게 평생을 군인으로 지내다 처음으로 정치를 하게 된 재커리 하지만 임기가 시작되자마자 큰 골칫거리가 재커리의 발목을
잡았으니 바로 노예 문제였습니다. 멕시코로부터 넘겨받은 지역에서 노예제도를 허용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여부를 두고 북부인들과 남부인들이 극한 대립을 하게 된 것입니다. 사실 재커리는 남부 출신의 노예를 소유하고 있었지만 노예 문제는 주에 맡기자는 입장을 가지고 있었으며 무엇보다 자신의 가장 큰 관심사는 어떻게든 미국이라는 국가를 하나로 묶는 것이었습니다.
당연히 자신들의 편을 들어줄 것이라고 생각하고 엄청난 지지를 보냈던 남부 사람들은 중립적인 행동을 배신으로 받아들였고
급기야 일부 남부주들은 연방으로부터 탈퇴하겠다고 협박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자 재커리는 만약 정말로 남부가 독립하게
된다면 자신이 직접 군대를 끌고 내려가 반역자 놈들을 전부 다 교수형에 처할 것이라며 더 강하게 으름장을 놓습니다.
이러한 살얼음판 같은 상황 속에서 헨리 클레이 등 여러 의원들은 남부를 달래기 위해 도피 노예법 제정을 제한하는 등 1850년
타협안을 내놓게 됩니다. 그런다 타협안을 놓고 의회에서 옥신각신 하던 중 1850년 7월 4일 독립 기념일 행사에 참여했던
재커리는 갑자기 쓰러지게 됩니다.
그리고 불과 다 시우 갑자기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하필 독립 기념일 행사 날이 몹시 더운 날이었는데 상한
체리와 우유를 먹고 탈이나 그만 급성 위장염에 걸려 사망을 하고 만 것입니다. 그의 나이 67세 대통령이 된 지 겨우 16개월
만에 일이었습니다. 이로써 재커리는 9년 전 재임 중 사망한 휘그당 출신의 윌리엄 헨리 해리슨에 이어 재임 중 사망한
두 번째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총정리
재커리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둘러싸고 오랫동안 미국에선 혹시 재커리가 독살당한 것이 아니냐는 의혹이 끊이질
않았다고 합니다. 결국 그의 사후 141년 만인 1991년에 이르러 유해를 부검하게 되었고 그 결과 자연사로 밝혀졌다고
합니다. 40년간 군인으로 많은 전쟁에서 활약하며 군 지도자로서 뛰어난 능력을 보여준 재커리 테일러 그러면서 그는 전쟁에서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는 것을 보며 어떤 상황에서도 강한 국가 미국 연방을 지켜야 한다는 확보한 믿음을 갖겠다고 합니다. 하지만 대통령이 되자마자 남부와 북부에 첨예한 대립이 이어지는 바람에 자신의 뜻을 제대로 펼쳐볼 틈도 없었으며 또 갑자기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성과도 거의 남기지 못한 비운의 대통령으로 이름을 남기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미국의 제12대 대통령 재커리 테일러에 대해 알아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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