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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제12대 대통령인 재커리 테일러가 상한 체리와 우유를 먹고 갑자기 사망하게 되면서 부통령이었던
밀러드 필모어는 하루아침에 미국 제13대 대통령이 됩니다. 미국 역사상 두 번째로 부통령에서 대통령직을 승계한 대통령인데요.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백악관 주인이 되면서 평범한 사람도 아메리칸드림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몸으로 보여준 주인공이죠.
오늘은 미국의 제13대 대통령 밀러드 필모어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항목 | 내용 | |||||
필모어의 출생 | 1800년 1월 7일, 미국 뉴욕주 서머힐 | |||||
필모어의 사망 | 1874년 3월 8일, 미국 뉴욕주 버펄로 | |||||
대통령 재임기간 | 1849년 3월 4일 ~ 1850년 7월 9일, 미국의 제 13대 대통령 | |||||
주요 업적 | 영국의 하와이 왕국의 점령을 막은것. | |||||
후대의 평가 | 가난을 이겨내고 미국 최고의 자리까지 올랐지만 사회적, 시대적 상황이 운이 따라주지 않은 대통령. |
필모어가 태어나다.
1800년 1월 7일 미국 뉴욕주 서머힐에 살던 아버지 나다니엘 필모어와 어머니 PB 필모어 사이에서 8남매 중
둘째이자 장남으로 태어난 윌러드 필모어 대부분의 전임 대통령들이 금수저였던 반면 멜로디의 아버지
나다니엘은 소장농으로 겨우 생계를 꾸려야 했기 때문에 밀러드네 집안은 매우 가난했다고 합니다. 때문에
밀러드는 제대로 된 학교 교육은 꿈도 꾸지 못했으며 밥을 굶는 일도 자주 있었는데요. 하지만 유난히 배움에 대한
열망이 컸던 밀러드는 혼자서 독학으로 읽고 쓰는 법을 배웠다고 합니다. 그러다 밀러드가 10대 중반이 됐을 무렵
아버지는 이 하나라도 덜어내기 위해 의복 제조업주에게 돈을 받고 밀러드를 견습생으로 보내게 되죠. 밀러드는
그럴듯한 기술이라도 배울 것이라 기대했건만 주어진 건 힘든 허드렛일 뿐이었는데요. 결국 윌러드는 돈을 빌려서
수습비용을 갚은 뒤 다시 집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열정 가득한 공부
그리고 근처 방앗간에 새 일자리를 구해 낮엔 일을 하고 밤엔 도서관에서 닥치는 대로 책을 빌려와 공부를 했다고 합니다.
1819년 20살이 되어서 여전히 방앗간에서 일을 하던 밀러드는 비는 시간을 이용해 인근 마을에 있는 학교에 등록했습니다.
한 교실에서 전학년이 함께 모여 공부를 할 정도로 작은 학교였는데요 빌러드는 그곳에서 자신보다 겨우 2살 연상의 교사
에비게일 파워스를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되죠.
학교에 다닌 기간은 고작 6개월 정도뿐이었지만 내비게일은 멜로디의 인생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에비게일은 밀러드가 농부나 상인이 아닌 더 좋은 직업을 구할 수 있을 것이라며 꿈과 희망을 주었으며 또 더 어려운 과목을
공부할 수 있도록 책을 들려주고 응원과 격려를 아끼지 않았던 건데요.
덕분에 밀러드는 법률가의 꿈을 키우게 되었죠. 1819년 말 아들의 꿈을 알게 된 아버지는 자신의 임대주였던 판사에게 부탁해
빌러드가 그 밑에서 서기로 일하며 법률 공부를 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법률공부를 시작한지 4년 만인 1823년 밀러드는 24세 나이에 변호사 자격을 얻고 마을로 돌아와 그 마을의 유일한
변호사로 개업을 했습니다.
정치인이 되고 결혼을 하게 되다.
그러던 1826년 2월 5일 27살에 밀러드는 스승이자 연인이던 29살의 애비게일과 결혼을 하고 아이 둘을 키우며
무난한 결혼 생활을 이어갔습니다. 고향 마을에서 변호사로 제법 성공을 거둔 밀러드는 정치계로부터 러브콜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1828년 29세의 밀러드는 뉴욕주 주의회의원으로 선출되며 처음으로 정치에 발을
들이게 되죠. 그렇게 정치에 입문한 밀러드는 특히 채무자들의 투옥 문제에 관심을 두었다고 합니다. 당시만 해도
빚을 갚지 못하면 무조건 감옥에 가두는 것이 일반적이었는데 밀러드는 가난했던 자신의 과거를 떠올리며 이유를
불문하고 빚을 못 갚는다고 해서 무조건 투옥하는 것을 금지시키는 법률을 통과시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밀러드의 노력과 진심이 잘 전해졌는지 1832년엔 미국 뉴욕주 하원의원에도 선출되죠.
정치인으로서의 성장
밀러드는 처음엔 제3정당이었던 반미 소닉땅의 소속이었지만 1830년대 중반 당원 대부분이 휘그당으로 입당하면서
함께 휘그당 의원으로 넘어갔습니다.
이후 이따라 재선에 성공하며 1843년까지 하원의원으로 보낸 밀러드는 세입위원회의 의장으로 활동하며 수입상품들의
의무적으로 부과되는 세금을 늘린 보호관세의 주창자로도 이름을 남기게 됩니다.
하지만 1844년 그는 뉴욕주 주지사 선거에 도전했다가 실패하면서 버펄로로 가서 변호사 일을 다시 시작했습니다.
1846년 변호사 일을 하던 밀러드는 보폴로 대학의 총장에 취임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계속 정치인으로 제기할 기회를 찾았다고 합니다. 다행히 그 기회는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는데요.
바로 뉴욕의 감사원장 선거에 출마하게 된 것이죠. 그렇게 1848년 1월 1일 밀러드는 뉴욕의 최고재정 감독관으로 당선이
돼 뉴욕의 금융 시스템 개선을 위해 힘을 쏟게 됩니다.
그런데 갑자기 밀러드는 바로 그에 있었던 대통령 선거에서 재커리 테일러의 러닝메이트로 피그 당의 부통령 후보로 지명되는
상황에 놓이게 됩니다. 사실 밀러드는 전쟁영웅이었던 재커리에 비해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재커리가 뉴욕에서 승리하는데
있어 북부 출신인 밀러드가 도움이 될 것이라고 판단되어 지명된 것이었습니다.
선거 결과 재커리는 미국 제12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고 밀러드는 부통령의 자리에 오르게 됩니다. 사실 밀러드와 재커리는
서로의 배경도 정치적 입장도 너무도 달랐다고 합니다. 그래서 러닝메이트로 함께 선거해 나가긴 했지만 선거가 끝날 때까지
거의 만나지 않았다고 하는데요. 선거 이후에도 밀러드는 재커리 행정부에서 거의 찬밥 신세였다고 합니다. 특히 둘은
누에제와 남북 문제에 대해서도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죠.
재커리와의 갈등
재커리가 연방을 중요하게 생각하여 노력을 통해서라도 남부를 제압하려고 생각한데 반해 밀러드는 무엇보다
평화를 원했으며 그래서 남부와 북부의 타협점을 찾아주고 싶어 했습니다. 당시 남북의 상황에 대해 간단히
언급하자면 담배나 면화농사를 주로하는 남부에서는 막대한 노동력을 필요로 하는 산업구조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노예제가 필요하던 상황이었다고 합니다. 반면 공업을 기반으로 했던 북부에서는 노예 지를 반대한다는
도덕적인 이유도 있었지만 그 이면엔 남부의 노예제 때문에 값싼 노동력을 이용할 수 없다는 경제적인 이유도
있었던 것이죠. 여튼 남북은 지금까지는 서로를 견제하며 힘의 균형을 잘 맞춰오고 있었는데요. 영토 확장에 따라
연방의 새롭게 들어오는 주간 늘어나면서 다시 갈등을 겪게 됩니다. 특히 1849년 캘리포니아가 연방 가입을
신청해 오며 노예지의 허용 여부를 두고 주민 투표를 하게 되고 압도적인 표차이로 캘리포니아에서 노예제를
허용하지 않기로 결정이 나자 남부에서 크게 반발하고 나섰습니다. 그러자 1850년 초 휘그당의 상원의원
헨리 클레이가 타협안을 제안했습니다.
갑자기 대통령이 되다.
노예제를 할지 말지는 주민들의 의사를 존중하되 기존의 탈출 노예법을 더욱 엄격하게 개정해 남부의 권리를
보장하자는 것이 두 내용이었죠.
이 타협안에 대해 재커리는 공식적으로 반대 입장을 밝혔는데요.
반면에 밀러드는 공식적으로 자신의 입장을 밝히지 않았습니다.
다음 밀러드는 재커리에게 만약 자신이 캐스팅보드를 지기 될 경우 타협안에 지지표를 던질 것이라고 암시하기도 했던 것이죠.
그렇게 1850년 중반까지 두 사람은 타협안을 둘러싸고 하네 마네 옥신 각신 했다고 합니다.
그러던 중 1850년 7월 9일 대통령이었던 재커리가 갑자기 사망하게 되고 부통령이었던 밀러드는 다음날 바로 대통령직을
승계하며 미국 제13대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대통령으로서의 행보
1850년 7월 10일 쉰 한살의 나이로 미국의 새로운 대통령이 된 밀러드는 새 내각을 꾸린 뒤 제일 먼저 1850년
타협안과 탈출 노예법의 서명을 했습니다. 밀러드의 결단으로 한동안 남과 북에는 평화가 찾아오는 듯했죠.
하지만 이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이 법이 아주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었기 때문인데요. 탈출 노예법은
남부의 노예 소유주가 도망간 노예를 마음대로 잡아갈 수 있게 만든 법이었고 그러다 보니 함부로 남의 주에
들어가 노예를 잡아드렸던 겁니다. 심지어 해방된 자유 흑인들조차 다시 노예가 되게 만들어 버렸죠. 이런 말도
안 되는 법을 왜 통과시켰냐며 밀러들을 지지했던 북부 사람들은 밀러드에게 등을 돌렸고 결국 북부 사람들과
휘그당 내의 강경파들의 반발로 인해 밀러드는 1852년 대선에서 휘그당의 지명조차 받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임기 내내 북부와 남북 노예제로 골머리를 앓던 그는 자신의 능력을 제대로 펼쳐볼 기회조차 얻지
못했습니다. 그래도 그 와중에 몇 가지 성과가 있긴 했습니다. 바로 매슈 페리 제독을 일본에 파견해 일본을 강제
개항시켰으며 프랑스 나폴레옹 3세가 하와이 왕국에 관심을 보이자 먼로 독트린을 내세워 막아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밀러디의 아내 애비게일도 지적인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었는데 두 사람이 함께 백악관 최초의 도서관을
세우기도 했습니다.
이후의 말년기
1853년 3년도 안 되는 짧은 임기를 마치고 백악관을 떠나게 된 밀러드 그런데 대통령에서 물러난 지 고작 한 달 만에 아내
에비게일이 후임 대통령의 취임식에 참석했다가 폐렴에 걸려 갑자기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게다가 뒤이어 1854년 7월엔 외동딸 메리마저 콜레라로 사망하는 등 밀러드는 큰 불행을 겪게 되죠. 그러던 1856년 밀러드는
개역파들이 공화당으로 대부분 떠난 뒤 남겨진 휘그당원과 반 이민자 미국 정당을 통합한 know nothing 당의 대통령 후보로
지명되어 다시 한번 대선에 도전하기도 했는데요.
참패를 당하고 정치에서 은퇴를 하게 됩니다.
이후 다시 버팔로로 돌아가 지역사회에서 일하며 여생을 보냈다고 합니다.
그리고 아내와 사별한지 5년이 흐른 1858년 빌러드는 쉰아홉 살이라는 조금 늦은 나이에 캐롤라인 매킨토시라는
아주 부유한 미망인을 만나 재혼을 했습니다.
이 결혼 덕분에 밀러드는 경제적으로 한층 풍요로워졌으며 그의 집은 어찌나 크고 넓었던지 그 지역 사교계의 중심지가 되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1874년 2월 블러드는 뇌졸중으로 쓰러지게 되고 1년 후인 1874년 3월 8일 7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총정리
가난한 통나무집에서 태어나 변호사로 성공을 거두고 미국 최고의 자리까지 오른 밀러드 필모어는 사실 그는
개인적 능력이나 정치적 재능이 충분히 있었음에도 당시 미국이 노예제 문제로 남과 북이 심하게 분열을 하고 있던
상황이라 어떻게 보면 시대를 잘못 만난 불은의 대통령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까지 휘그당 출신의 마지막
대통령이자 미국 역사상 두 번째로 대통령직을 승계한 부통령 미국 제13대 대통령 밀러드 필모어에 대해 알아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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