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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미국의 2대 대통령 존 애덤스의 아들이자 , 미국 최초의 부자 대통령이 된 존 퀸스 애덤스에 대해 함께 알아보겠습니다. 존 퀸스 애덤스는 당시에는 대중에게 인기가 없어지만 시간이 지나며 재평가받고 있다고 합니다. 특히 그의 노예제 폐지의 노력과 머로 독트린을 선포할 때 구상을 맡았던 것들이 밝혀지며 많은 이들에게 재평을 받고 있다고 합니다. 그럼 지금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존 퀸스 애덤스 ( John Quincy Adams )

 

 

 

항목 내용
존 퀸시의 출생 1767년 7월 11일, 매사추세츠 식민지 브레인트리
존 퀸시의 사망 1848년 2월 23일, 워싱턴 D.C. 
대통령 재임 기간 1825년 ~ 1829년 , 제 6대 대통령
주요 업적 흑인의 노예제 해방을 위해 앞장선 것.
유언 This is the end of Earth. I am content.  이승도 끝이구만. 난 만족한다.

 

 

 

 

 

 

 

존 퀸스의 어린 시절

1767년 7월 11일 그레이트브리튼 왕국 매사추세츠주 브레인트리에 살던 아버지 존 애덤스와 어머니 

아비게일 애덤스 사이에서 둘째이자 장남으로 태어난 존 퀸시 애덤스 예전 영상에서 살펴본 것 같이 아버지 

존 애덤스는 당대 미국에서 잘 나가는 변호사이자 정치인, 외교관이었습니다. 그래서 존 퀸시는 10살 무렵까지 

바쁜 아버지를 대신해 주로 어머니에게 수학이나 언어, 고전 등을 배웠다고 합니다. 하지만 아버지 존 애덤스는

아들과 자주 편지를 주고받으며 아들에게 이런저런 조언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성장 및 학교 생활 

존 퀸시가 어렸을 때는 미국이 한창 독립 전쟁을 하던 시기였는데 1775년 9살이 됐을 땐 어머니와 함께 농장 언덕의  꼭대기에서 벙커 힐 전투를 지켜보며 지나가는 군인들을 보거나 대포 소리를 듣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러다 벙커 힐 전투가 끝나고 얼마 후인 1778년
12살이 된 존 퀸시는 특사로 파견된 아버지를 따라 유럽으로 가게 됩니다.

아버지 옆에서 자연스럽게 외교와 정치를 배우고 국제적 안목을 익혀가게 됩니다. 또 파리, 암스테르담, 라이덴 등
유럽 최고의 사립학교에서 수준 높은 교육을 받게 되는데 워낙 머리가 좋아서인지 존 퀸시는
프랑스어와 러시아어, 독일어, 스페인어 등 무려 7개 국어를 구사할 수 있게 됐다고 합니다.

참고로 존 퀸시의 IQ는 168로 미국의 역대 대통령 중 IQ가 가장 높다고 합니다.
1785년 19살이 된 존 퀸시는 자신의 미래를 위해 다시 미국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그리고 그 이듬해 하버드 대학에 입학합니다.

사람들과 어울리기보다는 혼자서 주로 책을 보고 사색을 즐기는 걸 좋아했던 존 퀸시는
입학 2년 만에 우수한 성적으로 하버드 대학을 졸업했습니다.

 

 

 

 

 

 

 

 

 

 

변호사가 되고, 정치에 관심을 갖게 되다.

이후 매사추세츠주 뉴베리포트에서 본격적으로 법학을 공부하게 되고 1790년에 변호사 자격을 취득한 후
보스턴에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하여 변호사로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처음 몇 년간은 정치에 관심을 두지 않고 변호사 일에 매달려 고군분투했지만
존 퀸시의 관심을 끈 건 역시나 정치였습니다. 그는 변호사 일을 하며 틈틈이 정치 사안에 대해 에세이를 쓰곤 했는데
1793년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서 긴장이 고조되자 존 퀸시는 조지 워싱턴 대통령의 중립 정책에 대해

지지하는 글을 썼고 이 기사는 워싱턴 대통령의 관심까지 받게 됩니다.

 

정치 입문 및 정치에서의 성장

그리고 이 일을 계기로 1794년 5월 28살의 나이로 네덜란드 주재 미국 장관으로 임명이 됩니다.
정치에 해박할 뿐 아니라 여러 개의 외국어에 능통했던 존 퀸시가 조지 워싱턴의 마음에 쏙 들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1796년 이번엔 포르투갈 미국 대사로 임명이 된 존 퀸시 그런데 그해 말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서 아버지 존 애덤스가 토머스 제퍼슨을 꺾고 미국의 2대 대통령이 되자 존 퀸시는 스스로 공직에서 물러나 버립니다.
얼마 후 존 애덤스 행정부에서는 그를 프로이센 공사로 추천했지만 존 퀸시는 물론 존 애덤스 역시 이를 완강히 거부했다고
합니다. 결국 전임 대통령인 조지 워싱턴까지 나서 당신의 아들이기 때문이 아니다 그는 외국 문제에 관한 한 우리나라에서 
가장 뛰어난 재질을 갖춘 젊은 이기 때문이다라며 설득한 끝에야 존 퀸시가 프로이센 주재 공사로 임명이 될 수 있었다고 합니다.

1800년 아버지 존 애덤스는 대통령 재선에 실패하게 됩니다. 그래서 존 퀸시는 다시 미국으로 돌아와 변호사 일을 시작합니다.
그리고 1802년 매사추세츠 주의회 의원으로 출마해 당선이 되고 이듬해인 1803년엔 미국 상원의원으로 선출이 됩니다

그런데 사실 이때까지만 해도 존 퀸시 역시 아버지처럼 연방당을 지지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상원의원으로 있던 당시
토머스 제퍼슨 대통령이 추진한 루이지애나 영토 매입을 찬성했다는 이유로 동료 정치인들에게 따돌림을 받게 됩니다.
이때 정파 정치에 회의를 느낀 존 퀸시는 연방당을 탈당하고 상원의원직에서도 물러난 후
하버드 대학에 교수로 가게 됩니다.

 

 

 

 

 

 

 

 

 

 

계속해서 바뀌는 역할

1809년 미국의 4대 대통령 제임스 매디슨에 의해 미국 최초의 러시아 주재 대사로 임명이 되며
존 퀸시는 다시 외교관의 길을 걷게 됩니다. 그러면서 러시아를 설득해 미국 선박이 러시아 항구에서 무역을

할 수 있는 길을 열기도 했습니다. 1814년에 니 미영 전쟁을 종식시킨 헨트 조약을 체결하기도 하고
1815년엔 아버지가 30년 전에 맡았던 영국 주재 대사를 지내기도 했습니다.

 

대통령 이전의 활약

그리고 1817년 미국의 5대 대통령으로 제임스 먼로가 당선이 되면서
이때부터 8년간 존 퀸시는 먼로 행정부에서 국무장관으로 지내게 됩니다.

그는 외교관으로 뛰어난 활약을 보여줬지만 미국 역사상 가장 뛰어난 국무장관 중 한 사람으로 꼽힐 만큼
국무장관으로 뛰어난 능력을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스페인으로부터 플로리다와 북서 태평양 연안의 영토를 매입할 때
직접 교섭을 맡아 미국의 영토를 넓힐 수 있었습니다.

또 캐나다 연안에서 미국 어업권을 성공적으로 협상해 얻어냈습니다. 
또 미네소타에서 로키산맥까지 현재의 미국, 캐나다 국경을 설정하는 데 일조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제임스 먼로 대통령의 가장 큰 업적으로 평가받고 있는
먼로 독트린을 구상하고 작성한 것도 바로 존 퀸시의 작품이란 사실입니다.

 

 

 

 

 

대통령이 되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1824년 먼로의 뒤를 이을 대통령 후보로 존 퀸시는 급부상하게 됩니다.  하지만 미영전쟁 당시 뉴올리언스 전투에서 영국군을 섬멸하며 전쟁 영웅으로 떠오른 앤드류 잭슨도 대통령 후보로 나서며 선거는 그야말로 각축전을 벌이게 됩니다. 그리고 선거 결과 전쟁 영웅 앤드류 잭슨이 41.3%로 1위를 차지하고
존 퀸시는 30.9%로 2위를 차지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때까지만 해도 후보로 나왔던 4명 모두 선거인단 투표에서

과반을 얻지 못했기 때문에 수정헌법 12조에 의해 의회에서 다시 선거를 치러야 했습니다. 이때 존 퀸시는 네 번째로 지지를 받았던 헨리 클레이와 손을 잡게 되었고 그 결과 1등을 달리고 있던 앤드류 잭슨을 꺾고

미국의 제6대 대통령으로 당선이 되는 이변을 일으킵니다.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선거인단 투표에서 과반수를 득표하지 못하면
의회가 대통령을 결정한다는 수정헌법 12조가 채택될 당시 존 퀸시는 누구보다 이를 반대했는데
결국 자신이 반대했던 법안 덕분에 그는 대통령에 당선될 수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대통령으로서의 행보

1825년 3월 59세의 나이로 아버지의 뒤를 이어 미국의 첫 부자 대통령이자 제6대 대통령이 된 존 퀸시 애덤스
그는 제일 먼저 헨리 클레이를 국무장관으로 임명합니다.

그러자 아깝게 대통령 선거에서 떨어진 앤드류 잭슨은 크게 반발하며 존 퀸시 임기 4년간 그의 발목을 잡고 늘어지게 됩니다.
여하튼 미국의 새로운 대통령이 된 존 퀸시는 임기 초반 자신의 구상대로 여러 가지 사업을 적극적으로 추진합니다.

과학기술 분야에서는 미국이 주도권을 잡아야 한다며 국립대학을 설립하고 천문대 건립을 추진하기도 했으며
전임이었던 제임스 매디슨이나 제임스 먼로와 달리 연방 정부가 중심이 되어 도로나 운하 건설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1828년엔 C&O 운하 건설을 착공시키기도 합니다.

하지만 앤드류 잭슨을 비롯한 반대론자들이 이런 것들이 초헌법적 발상이라며 반대를 하고 나서는 바람에
자신의 뜻을 제대로 펼칠 수 없었습니다.

게다가 존 퀸시가 재임하던 시기에는 경기 침체도 호전되고 있었고 별사건도 없던 평화로운 시기로
업적을 세울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었습니다.

또 평소 대중의 여론에 따라 움직이는 포퓰리즘을 경계했던 존 퀸시는 일반 국민들의 마음을 살 만한 정치를 추구하기도 않았습니다. 그 결과 1828년 존 퀸시는 앤드류 잭슨에게 참패하며 역사상 두 번째로 연임에 실패한 대통령이 되고 맙니다.

 

 

 

대통령 이후 다시 정치에 참여하다.

존 퀸시는 자신의 아버지처럼 새 대통령의 취임식에도 참석하지 않고 고향 매사추세츠로 내려가 버렸습니다.
대통령에서 퇴임한 후 존 퀸시는 그저 처음엔 농장에서 조용히 집필 활동이나 하며 시간을 보낼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1830년 뜬금없이 매사추세츠주 하원으로 선출이 되며 제2의 정치 인생을 시작하게 됩니다.
'아니 대통령까지 한 사람이 다시 의원을 한다고?' 지금도 의아하게 여겨지지만 당시에도 전무후무한 일로
존 퀸시는 모든 공직에는 지위에 차이가 있을 뿐 본질에는 큰 차이가 없다며 국가와 국민을 위해 사명을 

다하고 싶을 뿐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죽는 순간까지 무려 17년 동안 하원의원으로 활약하며
대통령으로 재임하던 당시보다 더 많은 업적을 남기게 됩니다.

 

이후 업적

그가 남긴 큰 업적은 바로 반노예제도의 선봉장이 되어 노예제를 강하게 반대하고 나선 것입니다.
'이건 나쁜 것 노예제는 미합중국의 더러운 오점'이라는 표현까지 써가며 만약 노예제가 피와 전쟁을 통해야만 없어질 수 있다면
전쟁이라도 해야 한다고 발언하기도 했습니다.

또 남부 출신의 의원들이 하원에서 반노예제도의 청원을 자동적으로 인정하지 않게 만드는 내용의 법안이 통과되자
그건 위헌이라며 수년을 투쟁한 끝에 1844년엔 결국 이를 폐지하는 데 성공을 거두기도 합니다.

그리고 쿠바에서 도망쳐 나온 후 스페인 함선에서 반란을 일으킨 흑인들의 자유를 위해 이들을 변호하고 결국 승리를 받아내기도 했습니다 이 아미스타드호 사건은 나중에 '아미스타드'라는 이름으로 스티브 스필버그 감독의 영화로 탄생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존 퀸시의 이런 뚝심 있는 모습은 당시 정치 신인이던 에이브러햄 링컨에게 큰 영향을 주었고
링컨은 훗날 노예 해방을 선언하기에 이릅니다.

 이후 나라의 원로로서 활발히 정치 활동을 이어가던 중 11대 대통령인 제임스 포크가 멕시코 전쟁을 일으키려 하자 이를 고함까지 질러가며 반대를 하다 뇌졸중을 일으켜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이틀 후 인 1848년 2월 23일 존 퀸시는 82세의 일기를 끝으로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눈을 감기 직전 '이승도 끝이구나 만족한다'라는 짧을 말을 남겼다고 합니다.

 

 

 

 

 

총정리

유난히 냉철하고 고집스러운 성격 때문에
일반 대중에게는 큰 인기를 얻지 못했으나
자신이 옳다고 생각한 신념을 위해선 죽는 날까지 싸움을 멈추지 않았던 존 퀸시 애덤스, 그가 남긴 의지는 훗날 링컨이 노예 해방을 선언하는데 도 영향을 줍니다.
지금까지 뛰어난 정치인이자 외교관 그리고 국무장관
미국의 6대 대통령 존 퀸시 애덤스에 대해 알아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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