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미국이 영군에게서 독립하고 혼란하던 시기, 미국은 모두를 공평하게 다스릴 하나의 법이 필요했습니다. 지금도 세계 거의 모든 나라에 존재하는 헌법이 말이죠, 당시 미국에서는 이 헌법에 대해 많은 회의가 오갔지만, 그중 가장 기본이 되는 10조의 조항을 만들어 낸 이가 있습니다. 바로 제임스 매디슨이죠, 훗날 미국의 4대 대통령이 되고, 영국과의 완전한 해방을 의미하는 미영 전쟁에서 뛰어난 성과를 보이며 승리한 그에 대해 오늘 함께 알아보겠습니다. 

 

 

 

제임스 매디슨 ( James Madison )

 

 

 

항목 내용
제임스 매디슨의 출생 1751년 3월 16일, 대영제국 버지니아 식민지 포트콘웨이
제임스 매디슨의 사망 1836년 6월 28일, 버지니아주 몬트펠리어
대통령 재임기간 1809년~ 1817년, 미국 제 4대 대통령
주요 업적 헌법의 주요 내용의 작성하였으며, 미영 전쟁의 승리로 영국의 미세한 영향력도 없앰
후대의 평가  미국헌법의 아버지라 불리며, 3번째 대선도 많은 권유가 있었지만, 결국 물러난 자. 위대한 미국인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림.

 

 

 

 

 

 

 

 

제임스의 어린 시절

1751년 3월 16일 버지니아 주 포트 콘웨이에 살던 아버지 제임스 매디슨 시니어와 어머니 넬리 매디슨 사이에서 12명 중 장남으로 태어난 제임스 매디슨. 아버지는 담배 농장을 경영하던 경영주로 꽤 큰 부자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자식 12명 중 5명은 일찍이 세상을 떠났고, 7명만 성인이 되었다고 합니다. 제임스역시도 어린 시절부터 자주 아팠고, 허약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제임스의 어린 시절 취미는 독서였다고 합니다. 제임스는 미국의 역대 대통령 중 최단신인 163cm, 몸무게도 45kg 밖에 나가지 않았다고 합니다. 

 

제임스의 학교생활

 1760년대 초 제임스네 가족은 버지니아 주 오렌지카운티에 새 저택, 몽펠리에를 짓고 이곳으로 이사를 가게 됩니다. 
 제임스가 12살이 된 1762년 그는 집을 떠나 스코틀랜드 가정교사 로버트슨이 운영하는 기숙학교에 들어갔습니다. 그곳에서 영어와 라틴어, 그리스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 역사, 산수, 대수학, 기하학 등을 공부하게 되는데 몸은 허약했지만 머리는 상당히 좋았던 제임스는 학교 성적도 매우 좋았다고 합니다. 
 그 이후 5년 뒤 제임스는 다시 고향집 몽펠리에로 돌아오게 됩니다. 아버지가 제임스의 건강을 걱정해 가정교사를 붙여 집에서 대학 입시를 준비할 수 있게 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 헐게 1769년 19살이 된 제임스는 지금의 프린스턴 대학으로 잘 알려진 뉴저지 대학에 입학했습니다. 
 당시만 해도 토머스 제퍼슨과 같은 버지니아의 많은 젊은이들은 윌리엄 앤 메리 대학에 입학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는데 , 그 지역의 습한 기후가 건강에 해로울 것 같다는 생각에 제임스는 좀 더 북쪽에 있는 대학으로 진학하게 된 것이라 합니다. 
 그렇게 그는 라틴어부터 그리스어, 과학, 철학, 지리학까지 다양한 과목을 공부한 후 높은 성적으로 2년 만에 대학을 졸업하게 됩니다. 그 후 이 대학의 첫 대학원생이 되어 히브리어와 정치 철학을 더 공부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대학원에서 공부하는 동안 제임스의 건강이 많이 나빠지는 바람에 결국 1772년 다시 몽펠리에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법학을 공부해, 정계로 나아가다.

그런데 그때부터 그는 본격적으로 법학을 공부하며 법학자로서의 자질을 갖추어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법학을 공부하기 시작한 제임스는 그때까지만 해도 자신이 뭘 해야 할지 확신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러던 중 식민지에 대한 영국의 과한 세금 제도를 보며 자연스럽게 정치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1774년 12월 오렌지 카운티의 안전 위원회에 선출된 것을 시작으로 이듬해 10월엔 민병대의 대령으로 임명돼 미국의 독립전쟁을 준비하게 됩니다. 하지만 몸이 약했던 제임스는 1776년 다시 버지니아 주 의회의 대의원이 되며 본격적으로 정치에 발을 들이게 됩니다. 

 

미국의 헌법을 제정하다.

 그렇게 주 의회에서 일하며 자신의 법률 지식을 바탕으로 버지니아 주 헌법을 창안하게 된 제임스 , 그리고 그 무렵 제임스는 훗날 미국의 제3대 대통령이 될 토머스 제퍼슨을 만나게 됩니다. 이후 토머스가 버지니아 주지사로 선출 됐을 땐 제임스는 주지사 위원회에서 일하며 토머스와 좋은 협력관계를 유지해 나갔습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버지니아의 대표로 제2차 대륙회의에 참여하게 된 제임스. 그때 겨우 30살로 최연소 대의원으로 이름을 올리게 됩니다. 이후 제임스는 독립전쟁이 마무리되는 1783년까지 대륙회의에서 활동한 뒤에 다시 버지니아 주 의회로 돌아왔습니다. 
 한편 1787년 55명의 대표단이 필라델피아에 모여 헌법 제정회의를 열게 됩니다. 미국은 알다시피 여러 개의 주들이 하나로 연합된 나라로 이들을 하나로 묶기 위해선 새로운 헌법이 필요한 상황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모두 저마다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조금씩 의견이 달랐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제임스는 버지니아 대표로 회의에 참석했습니다. 그는 이 회의에 참석하기 몇 달 전부터 도서관에 틀어박혀 정치 철학과 정부 형태에 대해 열심히 연구하며 지냈다고 합니다. 사실 처음 모두는 원래 있던 것을 가볐게 수정하면 되겠지 하는 가벼운 마음으로 참석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제임스는 정부를 잘 이끌어 나갈 수 있는 새로운 시스템에 대한 아이디어를 제시하며 더 나은 헌법을 제정할 수 있도록 큰 역할을 하게 됩니다. 이때 입법부, 행정부, 사법부로 나뉘는 삼권분립의 제도를 창안하여 미국헌법에 도입하게 돼 빈다. 
 이후 미국 헌법이 채택되고 , 제임스는 미국 헌법의 아버지라는 별명을 얻게 됩니다. 하지만 사실 이 헌법엔 국민의 권리에 대한 조항이 없었습니다. 너무나 당연한 것이기에 따로 명시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 그 이유였습니다. 하지만 계속해서 이에 대한 문제가 제기되자 제임스는 10개의 수정안을 발표했습니다. 현재 미국 수정 헌법이라고 불리는 1조부터 10조까지의 내용이었는데 , 오늘날 대부분의 국가들이 헌법상 기본으로 보장하고 있는 자유와 권리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어쨌든 제임스의 노력 끝에 이 수정안들은 1791년 권리장전으로 채택되어 수정헌법이 됩니다.

 

 

 

 

 

 

 

 

 

 

대통령이 되다.

제임스는 원래 제임스는 조지 워싱턴과 그의 행정부를 지지하던 인물이었습니다. 하지만 조금씩 생각이 달라지고 있었습니다. 특히 재무장관과 재정정책을 두고 큰 갈등을 일으키게 됩니다. 재무장관은 나라의 부국강병을 이루기 위해선 다수의 평민이나 농민보다는 소수의 부유층과 상공업자들을 위한 경제 정책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를 위해 연방정부가 이들의 부채를 대신 떠맡는 정책과 연방은행을 만들어 금융 안정을 꾀하는 정책을 내놓은 것입니다. 제임스는 토머스 제퍼슨과 함께 연방은행설립은 위헌이라고 강하게 주장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791년에 이 법안은 통과되고 말았습니다. 이일을 계기로 제임스와 토머스 제퍼슨은 미국 최초의 야당이라 불리는 민주 공화당을 창당하게 됩니다. 하지만 1797년 계속된 정치 전쟁에 지친 제임스는 은퇴하겠다며 아내와 함께 버지니아로 돌아가 버렸습니다. 하지만 1801년 민주공화당의 토머스 제퍼슨이 제3대 대통령으로 당선되며 제임스는 국무장관이 되어 다시 화려하게 복귀했습니다. 그렇게 미국 면적을 두배로 늘리는 루이지애나 땅 매입을 진두지휘하는 등 1809년까지 제퍼슨 정부에서 맹활약하게 됩니다. 이후 1808년 미국 3대 대통령 토머스 제퍼슨의 두 번째 임기가 끝나갈 무렵 미국의 4대 대통령을 뽑기 위한 선거가 진행되었고, 제임스가 민주공화당의 대통령 후보로 출마하여 당선됩니다. 그렇게 제임스는 미국의 4대 대통령이 됩니다. 

 

대통령으로서의 업적

 제임스의 대통령 생활은 시작부터 순탄치 않았습니다. 미국은 여전히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 끼어 골치를 썩고 있었는데 특히 영국은 점점 강도를 높여 미국을 압박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후 영국이 미국의 해안을 급습하는 일이 벌어지자 제임스는 임기가 끝날 무렵인 1812년 영국에 선전포고를 합니다. 
 이후 재선에 성공하게 되고 , 미국의 제2의 미국 혁명이라 불리는 미영전쟁이 시작됩니다. 
 하지만 전쟁상황은 녹록지 않았습니다. 전쟁이 지지부진 길어지는 가운데 1814년 영국군에 의해 수도 워싱턴이 점령당하고 백악관 의사당, 의회 도서관까지 모두 불타는 수모를 겪게 된 것입니다. 참고로 이때 불에 검게 그을린 백악관의 복구 작업을 하며 외벽을 흰색 페인트로 칠하게 됐고, 이때부터 이름도 백악관이라 부르게 됩니다. 
 사실 영국도 당황스럽긴 마찬가지였습니다. 만만하게 봤던 미국이 자신들과 비슷한 수준으로 싸우고 있었고, 그로 인해 전쟁이 점점 더 길어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미 프랑스와의 전쟁으로 지쳐있던 영국은 결국 미국에 종전 협상을 요청했고, 그렇게 미국과 영국은 벨기에 헨트에서 종전협상을 맺게 됩니다. 
 그로부터 며칠 뒤인 1월 8일 아직 종전 협상 소식을 듣지 못한 지역에서 미영전쟁 최대의 격적이 벌어졌습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미국이 영국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게 된 것입니다. 영국군은 2천이 넘는 전사자가 나온 가운데 미국군은 21명만이 전사한 그야말로 압도적인 승리였습니다.
이 사건으로 미국인들의 자존심은 하늘을 찔렀고, 제임스는 전쟁 중 한 번도 헌법을 위반하지 않고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며 놓은 평가를 받게 됩니다. 이후 임기가 끝나고 재선의 요청이 많았지만 거절한 뒤 아내와 함께 몽펠리에로 돌아갔습니다. 이후 말년에는 아들의 빚으로 궁핍한 생활을 하다 1836년 6월 28일 8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총정리

제임스는 헌법의 아버지답게 법률과 관련된 많은 저서를 남긴 것으로 유명합니다. 특히 연방주의자 논문집은 지금도 정치학 쪽에서 고전으로 평가받고 있으며 그 외의 작품도 수작으로 평가받고 있다고 합니다. 지금까지 미국의 헌법의 아버지 제임스 매디슨의 이야기를 합께 알아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글 보관함
최근에 올라온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