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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미국 대통령은 모두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귀족 출신이었습니다. 하지만 귀족출신이 아닌 최초의 서민 대통령이 탄생하게 됩니다. 바로 미국의 제7대 대통령 앤르류 잭슨입니다. 앤드류 잭슨은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 정규교육을 거의 받지 못한 비주류 출신 대통령으로 당시 기득권화 되어 있던 미국 정치에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새로운 바람을 몰고 온 미국 제7대 대통령 앤드류 잭슨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항목 | 내용 | |||||
앤드류의 출생 | 1767년 3월 15일, 대영 제국 사우스캐롤라이나 식민지 웩스호스 | |||||
앤드류의 사망 | 1845년 6월 8일, 미국 테네시주 내슈빌 | |||||
대통령 재임 기간 | 1829년 ~ 1837년 , 미국의 제 7대 대통 | |||||
주요 업적 | 보통 사람들의 권익 보호를 위해 힘쓴 것. | |||||
후대의 평가 | 여러 논란의 중심에 있는 대통령. |
앤드류의 어린 시절
1767년 3월 15일 사우스캐롤라이나주 왁스호에 살던 아버지 앤드류 잭슨와 어머니 엘리자베스 잭슨 사이에서
3형제 중 막내아들로 태어나 아버지와 같은 이름을 얻게 된 앤드류 잭슨 앤드류네 집은 아일랜드에서
건너온 가난한 이민자 가정으로 한마디로 전임 대통령들과 달리 흙수저 출신이었습니다.
게다가 앤드류의 아버지는 아들이 태어나기 3주 전 벌목 사고를 당해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앤드류는 아버지의 얼굴조차 보지 못했습니다.
성장과정
혼자서 아들 셋을 키워야 했던 어머니는 앤드류가 커서 장로교 목사가 되길 바랐다고 합니다. 하지만 어렸을 때부터
성질이 급하고 난폭해 자주 싸움을 하는 아들을 보며 일찌감치 어머니는 그 꿈을 접게 됩니다.
홀어머니 밑에서 자라며 늘 가난에 시달려야 했던 앤드류는 어린 시절 학교 교육을 거의 받지 못했으며
교회 목사에게 겨우 글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그러던 1775년 미국은 영국을 상대로 독립 전쟁을 일으키게 되는데 이 독립 전쟁은 앤드류의 인생에도
치명적인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바로 1779년 먼저 전쟁에 뛰어든 큰형이 열사병으로 사망을 하게 되고 1781년 앤드류도 둘째 형과 함께 독립군 민병대에
합류해 전투에 참전했다가 영국군에 포로로 잡혀 포로 생활을 하게 된 것입니다.
앤드류와 둘째 형은 천연두에 걸리기도 했는데 그 시기 극적으로 포로 교환을 통해 자유의 몸이 될 수 있었습니다.
석방 직후 둘째 형은 천연두로 결국 목숨을 잃게 되고 어머니 역시 부상당한 군인들을 간호하다
병이 걸려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앤드류는 순식간에 천애 고아가 되고 맙니다.
변호사가 되다.
혼자가 된 앤드류는 멀리 아일랜드에 있는 할아버지로부터 약간의 유산을 받게 됩니다. 먼 친척 집에서 신세를 지며
간신히 학교를 마칠 수 있었는데 졸업 후엔 잠시 학교 교사로 일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1784년 18살이 됐을 무렵 그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법학을 공부하기로 마음을 먹습니다.
그리고 혼자 노스캐롤라이나주의 솔즈베리로 가서 한 변호사 밑에서 일을 하며 법률 공부를 시작하게 됩니다.
제대로 된 교육도 받아본 적 없지만 타고난 머리는 좋았던지 1787년, 앤드류는 21살의 젊은 나이에
변호사 시험을 합격하고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하게 됩니다.
변호사로서의 성장과정
하지만 다른 변호사들처럼 든든한 배경이나 집안의 후원이 없었던 앤드류는 일을 따내기 위해 남들보다
더 악착같이 일을 해야 했습니다.
그러다 1788년 지인의 소개로 테네시주 존스버러와 그린빌에서 잠시 지방 검사로 활동을 하기도 했습니다.
지방 검사로 지내던 앤드류는 1788년 가을 내슈빌로 이사를 가게 됩니다.
그리고 그는 그곳에서 레이첼 로바즈라는 여성을 만나게 됩니다.
앤드류는 레이첼과 결혼을 한 이후 점점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성공을 거두게 됩니다.
특히 이제 막 개발 붐이 일고 있던 서부에선 폭행 사건과 부동산 거래 투자 등에 관한 변호사 일이 많아졌는데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부동산에 일찍 눈을 뜨게 된 그는 부동산 투기로 많은 돈을 벌게 됩니다.
그렇게 번 돈으로 농장과 노예들을 사들이고 내슈빌 근처에 허미티지라는 이름의 저택을 세우게 됩니다.
잘 나가는 변호사에 100여 명의 흑인 노예를 거느린 대농장주가 된 앤드류는 그 지역의 판사로 임명되기도 합니다.
정치에 참여하다.
그러나 아직 30대 피가 끓었던 앤드류는 거기서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1796년 테네시주의 새로운 헌법 초안을 작성하는 전당대회에 참여하고 이후 테네시주의 하원의원으로 선출이 되며 정치에 발을 들인 것입니다.
이후 미국 상원의원을 거쳐 1798년엔 테네시주 최고 재판소 판사로 선출되며 그야말로 고속도로처럼 쭉쭉
성공 가도를 달리게 됩니다. 1801년 테네시주 민병대가 결성되자 앤드류는 이번엔 자원입대를 결정하여
본격적으로 군 경력을 쌓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10년간 민병대 사령관으로 재임하며 초강경 진압 정책을 통해
아메리카 원주민들을 탄압하여 미국 개척민들에게 수호자로 명성을 얻게 됩니다.
전쟁에서 활약하다.
이후 1812년 영국과의 미영 전쟁이 일어나자 앤드류 역시 민병대를 이끌고 전투에 참여하게 됩니다.
1814년 4월엔 호스슈 밴드 전투에서 승리를 하며 현재 조지아와 앨라배마에 해당하는 넓은 땅을 차지하는데
큰 공을 세우게 됩니다.
그러던 1814년 12월 24일 미국과 영국은 벨기에 헨트에서 미영 전쟁을 끝내는
헨트 종전 협상을 맺게 되는데 1815년 1월, 아직 미영 전쟁이 끝난 줄 모르고 있던 앤드류는 2천 명도 안 되는 대원들을 데리고
1만 명에 달하는 영국군을 상대로 그야말로 대승을 거두며 전쟁영웅이라는 칭송을 받게 됩니다.
여기에 더해 1817년에는 조지아주에서 아메리카 원주민 부족 세미놀족과 크리크족의 반란을 진압한 뒤
그 배후에 스페인이 있음을 판단하고 당시 스페인령이었던 플로리다를 침공하게 됩니다.
당시 존 퀸시 애덤스 국무장관은 혹시나 이 일로 스페인과 전면전이 벌어질 것을 걱정하며 앤드류를 징계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오히려 앤드류는 '플로리다를 스페인 땅으로 남겨둘 경우 후환이 생길 것'이라고 제임스 먼로 대통령을 설득했습니다.
결국 앤드류의 말처럼 스페인을 압박하는 정책을 취하게 되었고 1819년 플로리다는 미국의 영토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전쟁 영웅 앤드류 잭슨은
다음 대통령 후보로서 이름이 오르내리게 됩니다.
이후 아깝게 고배를 마시게 되며, 승리를 엘리트들에게 도둑맞았다 분개하며, 더 이상 엘리트들의 온 간에 놀아날 여지를 없애야 한다며, 이 사건을 계기로 당시 민주공화당은 앤드류 지지파의 민주당과 반대파인 국민공화당으로 갈라서게 됩니다.
지금의 미국 민주당과 공화당이 바로 이때부터 시작이 된 셈입니다.
대통령이 되다.
그리고 다시 4년 후인 1828년
앤드류는 재선을 노리는 존 퀸시 애덤스와 다시 격돌을 하게 됩니다.
이 선거는 미국 역사상 인신공격과 흑색선전이 판을 치는
가장 지저분한 선거전으로 꼽히곤 하는데
상대측에선 학력이 변변치 못한 앤드류를 놀리기 위해
'수컷 당나귀'와 '멍청한 촌놈'을 뜻하는
'잭애스'라는 별명을 지어 퍼뜨리기도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앤드류는 의외로 이 별명을 무척 마음에 들어 했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민주당의 상징이
당나귀가 됐다는 얘기도 있을 정도라고 합니다.
앤드류는 그렇게 진흙탕전 선거를 치르면서도
유권자들을 찾아다니며 직접 지지를 호소하기도 했습니다.
그 결과 앤드류는 마침내 미국의 새로운 대통령으로
백악관에 입성할 수 있게 됩니다.
금수저가 아닌 흙수저가, 귀족이 아닌 서민이
주류가 아닌 비주류 출신도 대통령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놀라운 사건이었습니다.
대통령으로서의 행보
1829년 63세의 나이로 미국의 제7대 대통령이 된 앤드류 잭슨.
그가 대통령이 된 후 미국은 정치, 사회적으로 대격변의 시대를 맞이하게 됩니다.
앤드류는 소수의 간부가 아닌 일반 당원들이 대선후보를 뽑는 전당대회 제도를 공식화 시켰으며
그때까지만 해도 있었던 투표를 하려면 재산이 어느 정도 있어야 한다는 재산 조건을 철폐해
가난한 사람도 한 표를 행사할 수 있게 만들기도 했습니다.
또 소수의 엘리트, 있는 집안 출신들만 관직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잘못됐다며 그 자리를 개방해 재산과 학력이 없는 평민들도
공무원이 될 수 있는 길을 마련했습니다
이렇게 관료제 개혁, 참정권 확대 기회의 균등을 보장하는 그의 정책들은 일명 '잭슨 민주주의'로 불리며
미국 대중 민주주의 시대의 개막을 열었다며 높은 평가를 받게 됩니다.
물론 논란도 있었습니다. 일명 "은행전쟁" 이라 불리는 이 사건은 앤드류가 은행이 특권층만을 위해 움직인다 생각하여 은행과 다툼이 있었고, 이로써 압도적 지지로 재선에 성공했지만 국가가 재정적 혼란에 빠지고 말게 됩니다. 이후 실시한 금융정책도 실패로 돌아가며 서민 경제는 어려움을 겪기도 하게 됩니다. 이후 불만을 품은 시민이 앤드류를 암살하려고도 합니다.
이는 역대 처음으로 암살대상이 된 미국 대통령이라고 합니다. 이후 1837년 앤드류는 후임자 마틴 밴 뷰런에게 대통령 직을 넘기고 백악관을 떠나 다시 집이 있는 내슈빌로 향했습니다. 이후 조용히 말년을 보내다 거액의 빚에 시 잘리며 어려움도 겪고, 1845년 6월 8일 앤드류는 79세의 일기를 끝으로 조용히 눈을 감게 됩니다.
총정리
가난한 이민자의 가정에서 태어나 대통령이 되기까지 앤드류의 일생은 한마디로 드라마틱 했으며
그와 관련된 업적과 비판 그리고 논란도 다양합니다. 그중에서 특히 그가 비판을 받는 부분은
바로 아메리카 원주민 이주 정책에 관한 것입니다. 그는 언젠가는 서부에 거주하는 아메리카 원주민이
위험 요소가 될 것이라고 판단하여 아메리카 원주민의 토지소유권을 인정하라는 연방 대법원의 판결을 무시하고
1830년 일명 '인디언 추방법'을 발효시켜 미시시피강 동쪽에 살던 아메리카 원주민들을
아칸소와 오클라호마의 보호구역으로 강제 이주시켜 버렸습니다.
눈물의 행로'로 불리는 강제 이동 중 4천 명 이상의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추위와 전염병 등으로 목숨을 잃었으며
아메리카 원주민을 도운 양심적인 미국인들은 체포되어 처벌을 받았다고 합니다.
원주민을 학살한 살인마라는 평가부터 진정한 대중 민주주의를 시작한 선도자라는 평가까지
그에 대한 평가는 지금도 논란이 많습니다. 하나 분명한 건 그는 미국 정치사에 현대적 민주주의 제도를 확립시킨
대통령으로 이름을 올리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지금까지 미국 역사상 첫 서민 비주류 대통령으로 새로운 바람을
몰고 온미국 제7대 대통령 앤드류 잭슨에 대해 알아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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