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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악관의 전시된 역대 대통령들의 초상화 중 제일 잘생긴 대통령을 꼽으라며 언제나 꼽히는 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서 잘생긴 프랭클린이라는 별명도 붙여지는데요. 바로 미국 14대 대통령 프랭클린 피어스입니다. 
하지만 대통령으로서 능력이나 실력은요 결국 북부와 남부를 제대로 중재시키지 못해 남북 전쟁의 불씨를 

지피 우기도 하죠. 오늘은 미국의 14대 대통령 프랭클린 피어스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프랭클린 피어스( Fracklin Pierce )

 

 

 

어린 시절  
   
   
   
   
   

 

 

 

 

 

 

 

 

 

 

1804년 11월 23일 미국 뉴햄프셔주 힐스보로에 살던 아버지 벤자민 피어스와 어머니 안나캐드릭 사이에서 

8남매 중 다섯째로 태어난 프랭클린 피어스. 아버지 벤자민은 미국 독립 전쟁에 참전한 준장 출신으로 이후 

두 번이나 뉴햄프셔주의 주지사를 지냅니다. 한마디로 명문가문 출신이라고 볼 수 있죠. 프랭클린은 비교적 

여유로운 가정환경에서 형제들과 함께 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특히 그는 파란 눈과 곱슬곱슬한 머리카락을 가진 미소년으로 어렸을 때부터 뛰어난 외모로 인기가 많았다고

 합니다. 그러다 1812년 프랭클린이 9살이 됐을 때 미영 전쟁이 일어나고 아버지는 프랭클린의 두 형들을 

군대에 보내게 됩니다. 그래서 프랭클린은 중장출신이던 아버지와 전쟁에 참전한 형들을 보며 자연스럽게 군대나 

정치에 관심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교육

아버지 벤자민은 자식들의 교육에도 무척 관심이 많은 사람이었는데요. 프랭클린이 11살이 됐을 무렵 마을에 있는 사립학교에
 보내고 1년 후에는 집에서 좀 더 멀리 떨어진 기숙학교에 입학시켰습니다.

하지만 어린 나이에 부모와 떨어져 낯선 곳에 살게 된 브랭클린은 그만 향수병에 걸리고 말았죠. 결국 그는 혼자 19km나 되는 
거리를 걸어 집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아버지는 돌아온 프랭클린에게 저녁을 차려주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뒤로 다시 학교에 데려다주었죠.
훗날 프랭클린은 이 순간에 자기 인생의 전환점이었다고 말했는데요. 그 후로는 묵묵히 학교 생활을 해나갔던 겁니다. 
그리고 그 해 말 프랭클린은 대학 입시를 준비하기 위해 필립스 엑시트와 카데미로 다시 전학을 갔습니다.

1820년 17살이 된 프랭클린은 메인주에 있는 보든 칼리지에 입학하게 됩니다. 이곳에서 훗날 미국 낭만주의 문학의 선구자가
 되는 나다니엘 호순과 절친이 되는데 나다니엘은 나중에 프랭클린의 전기를 써주기도 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독창적이고 
에너지가 넘쳤던 프랭클린은 대학에 입학한 후 학업보다는 사회 운동이나 진보적인 문학협회에 관심을 갖고 활발히 활동을 
이어갑니다.

그러다 결국 2학년 말 기말 시험에서 그는 가장 낮은 점수를 받게 되었는데요. 자신의 성적이 깜짝 놀란 프랭클린은 이래서는 
안 되겠다며 열심히 공부하기로 마음먹게 됩니다. 그렇게 1824년 대학을 졸업할 때는 전교 3등의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법률을 공부하고 변호사가 되다.

졸업 후 프랭클린은 당시 뉴햄프셔의 주지사 밑에서 법률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그 후 매사추세주 노샘프턴에 있는

 로스쿨에서 한 학기를 보내고 다시 뉴헴프 셔의 한 판사 밑에서 법률 공부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1827년 

프랭클린은 24살의 나이에 정식 변호사가 되어 콩코드의 법률사무소를 개업 있습니다. 사실 프랭클린은 유난히

 말발이 좋았던 데다 사람의 얼굴과 이름을 외우는 기억력이 뛰어났는데 거기에 뛰어난 외모와 깊은 목소리까지 

가지고 있어 곧 그 지역에서 능력 있는 변호사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습니다.

 

정치가가 되다.

변호사로 경력을 쌓아오던 중 아버지와 함께 1828년 대통령 선거에서 앤드류 잭슨의 선거운동을 도우며 자연스럽게 정치에도
발을 들이게 되는데요.

1829년에는 주지사로 있던 아버지를 등이었고 겨우 26살의 나이로 뉴햄프셔주의 하원으로 선출이 되었으며 2년 후엔 주의회
의장으로 임명되었습니다.

그리고 1833년엔 마침내 미국 하원 의원에도 당선되며 계속해서 승승장구하게 됩니다. 
1834년 31살의 프랭클린은 모교였던 보든 칼리지 학장의 딸 재인 애플턴과 결혼을 하게 됩니다.

둘의 성향은 전혀 달랐다고 하는데 인기가 많고 외향적이었던 프랭클린과 달리 제인은 무척 내성적인 여성이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제이는 남편이 정치를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1837년 프랭클린은 34살인 나이로 최연소 미국 상원의원으로 당선이 됩니다. 상원의원으로 정치를 하기 위해 고향인 
뉴헴프 셔를 떠나 워싱턴에서 생활을 해야 했던 그는 아는 사람도 별로 없고 낯선 워싱턴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며 결국 술에 
의지하기 시작했는데요.

 이러한 상황을 알았던 제이는 프랭클린이 워싱턴에 머무는 동안에 자신은 콩코드에서 주로 머물며 계속해서 남편에게 정치를
 그만하라고 설득했다고 합니다. 결국 1841년 프랭클린은 상원의원에서 사임한 뒤 콩코드로 돌아가 다시 변호사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군대에 입대하다.

이번에도 역시나 뛰어난 기억력과 말발로 법정에서 많은 청중들을 끌어모으는 스타 변호사로 명성을 떨치게 

되는데요. 때론 돈이 없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무료 변론을 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아내의 조언에 따라 술을 끊고 

음주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는데 이처럼 프랭클린은 정치에서 한발 물러나긴 했지만 다른 방식으로 정치에 

계속 관여를 했던 겁니다. 1844년 그는 제임스 포크의 당선을 위해 열심히 선거운동을 했습니다. 

그리고 결국 제임스 포크가 대통령의 당선되고 이후 프랭클린은 뉴햄프셔 지역의 미국 검사로 임명이

될 수 있었습니다. 1846년 미국과 멕시코 사이의 전쟁이 시작되자 프랭클린은 스스로 먼저 뉴헴프 셔 지역에서

자원봉사자를 모집하는 일을 하게 됩니다. 그는 자신의 아버지가 정치적으로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군경력이 

크게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임스 포크 대통령에게 부탁을 해 대령으로 임관되어

군생활을 하기 시작했는데요.

 

군생활

얼마 후엔 바로 준장으로 진급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1847년 전투경력이 거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프랭클린은 
윈필드 스콧 장군의 지위 아래 2000명이 넘는 원정대를 이끌고 멕시코의 베라크루스 해안을 침공하기도 합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별 탈 없이 군생활을 이어가던 프랭클린은 그 해 8월에 있었던 콘트레라스 전투에서 말이 걸려 넘어지는 
바람에 다리를 다치는 부상을 당하게 됩니다. 

다행히 이때는 부상이 심하지 않아 다음날 다시 전투에 참전하는데 여기서 또다시 다리를 다치면서 프랭클린은 이후 소극적인
 모습만 보이게 됐다고 합니다. 

나중에 정적들은 프랭클린의 이런 모습을 두고 프랭클린은 겁쟁이라며 두고두고 비난을 했으며 역사학자들 역시 군사
 지휘관으로서의 프랭클린의 능력에 대해선 물음표를 던지는 편이라고 합니다.

아무튼 멕시코 전쟁이 끝나고 프랭클린은 다시 집으로 돌아와 변호사 생활을 이어갔습니다.
그러던 1852년 그는 주변에 제안으로 민주당 대통령 후보자 경선에 참가하게 됩니다.

 

 

 

 

대통령이 되다.

당시만 해도 프랭클린은 그렇게 유력한 후보자는 아니었으며 무려 46번의 재투표를 거치는 동안 높은 인지도를 

자랑하던 후보자들이 탈락하고 다크호스나 다름없던 프랭클린이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가 된 것이었는데요. 

평소 프랭클린이 정치를 하지 않았으면 했던 아내 제이는 이 소식을 듣고 기절했다고 합니다. 어쨌든 프랭클린은 

자신의 전 사령관이었던 휘그당의 윈필드 스콧 장군을 상대로 선거했었습니다. 대통령이 당선된 후 프랭클린은

취임식 전 아내와 12살 아들을 데리고 가족 여행을 갔습니다. 그런데 이때 기차 탈선 사고가 발생하면서 그만

그의 아들이 세상을 떠나고 말았는데요. 사실 프랭클린과 제인 사이에는 3명의 아이가 있었는데 그중 둘은 

어린 시절 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남은 한 아이마저 사고로 잃은 것이라 더욱 충격적이었죠. 1853년 3월 4일 

프랭클린은 큰 슬픔과 충격 속에 취임식을 치러야 했으며 제이는 결국 남편의 취임식에 참석하지 않고
방에서만 은둔하며 먼저 죽은 아이들에게 편지만 썼다고 합니다. 심지어 2년가량은 제인 대신 제인의 이모가

영부인 역할을 대행해야 했는데 2년이 지난 후에야 제인이 영부인으로 활동했다고 합니다. 아무튼 프랭클린이
대통령의 취임할 당시 나이는 50살로 19세기에 태어난 최초의 대통령으로도 이름을 올렸습니다.

 

대통령으로서의 업적과 그의 마지막

프랭클린이 대통령의 취임했을 당시 미국 사회는 표면적으로는 정국이 안정된 시기로 보였습니다. 
그러다 1853년 12월 30일 남부대륙 횡단철도를 건설하기 위해 미국은 멕시코 천만 달러를 지불하고 오늘날의 
애리조나 남부와 뉴멕시코 남부에 해당하는 지역을 매입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 일은 프랭클린의 골칫거리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가 새 영토를 매입한 후 1854년 5월 30일에 캔자스 네브레스카 
법의 서명을 했기 때문이었죠. 사실 캔자스는 1820년에 만들어진 미주리 타협에 의해 원래는 노예주가 아닌 자유주가 돼야 하는 주였으나 세로 통과된이 법으로 인해 노해주를 할 것인지 자유주를 할 것인지 주민투표로 결정하도록 바뀌어 버린 것인데요. 
새로 가입하는 주들의 자유로운 결정을 존중한다는 논리를 내세웠지만 이는 애써 만든 미주리 타협을 파괴하고 실질적으로는 
남부의 편을 든 것이나 다름없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무렵 미주리 협정의 패기를 반대하며 휘그당 내 탈당파 자유토지당 북부 세력이 연합해 만든 당이 바로 오늘날의 
공화당입니다. 공화당은 지금이야 미국의 보수진영을 대표하는 정당이지만 당시만 해도 노예 해방을 주장했던 이들이 
주축이 돼 만들어진 진포파 주류의 빅텐트 정당이었다고 합니다. 여든이 일로 당연히 북부에서는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분노하며 프랭클린에게서 돌아섰고 이후 노예제 문제를 둘러싼 남부와 북부의 갈등을 점차 심해지게 된 것이었죠.

프랭클린은 결국 1856년 대선에서 민주당 후보로 지명받지 못했고 단 한 번의 임기로 대통령직을 마치게 되었습니다. 
1857년 3월 프랭클린은 건강이 약화된 아내를 회복시키고 자신의 복잡한 심경도 정리하는 차원에서 바로 해외로 여행을
 떠났습니다. 해외에서 2년의 시간을 보낸 후 두 사람은 다시 콩코드로 돌아와 살게 되는데 그러다 1863년 12월 안에 
제인이 먼저 세상을 떠나면서 프랭클린은 절친인 나다니엘 호선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기 시작했는데요.

1864년에는 투병 중이던 나다니엘과 함께 요양 목적으로 여행길에 오르기도 했죠. 
하지만 여행 도중 나다니엘은 병이 악화되면서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불과 1 2년 사이 아내와 절친이 세상을 떠나자 프랭클린은 다시 술의 위치에 살아가게 되고 결국
 1869년 10월 8일 66세의 나이에 강경화로 숨을 거두게 됩니다.

 

 

 

 

 

총정리

유능한 정치인이자 호감이 가는 인물이었다는 평에도 불구하고 프랭클린은 집권 초기 판단 미스와 
문제 제천 학력 부족으로 인해 복부 사람들의 지지를 잃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이로 인해 훗날 남북전쟁을 불러오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했죠.
그의 정부는 미국 역사상 가장 비참한 정권 중 하나로 판명되었다고 합니다.
국가 정치 지도자로서 프랭클린은 사고였다라며 그는 미국 역사상 최악의
대통령 중 한 사람으로 늘 손에 꼽히고 있습니다.
이상 미국의 제14대 대통령 프랭클린 피어스에 대해 알아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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