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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남북전쟁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대통령 바로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이죠.
그렇다면 남북전쟁이 시작되기 바로 직전 대통령은 누구였을까요.

바로 오늘 알아볼 제15대 대통령 제임스 뷰캐넌입니다. 미국에서 유일한 독신 대통령이자 남부와 북부에

갈등을 중지하지 못해 남북전쟁의 단초를 제공한 대통령 이번 영상에서는

미국의 제15대 대통령 제임스 뷰캐넌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제임스 뷰캐넌 ( James Buchanan )

 

 

 

항목 내용
제임스의 출생 1791년 4월 23일,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머서스버그.
제임스의 사망 1868년 6월 1일,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랭커스터.
대통령 재임 기간 1857년 3월 4일 ~ 1861년 3월 4일, 미국의 제 15대 대통령.
주요 업적 없음.
후대의 평가 미국 역사상 최악의 대통령이자 무능한 대통령.

 

 

 

 

 

 

 

 

 

제임스의 성장기

1791년 4월 23일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머 서스버그에 살던  아버지 제임스 뷰캐넌 시니어와 어머니

엘리자베스 비켜난 사이에서 11남매 중 둘째이자 장남으로 태어난 제임스 뷰캐넌 아버지 제임스 뷰캐넌 시니어는
1783년 아일랜드에서 미국으로 건너와 결혼을 하고 잡화점을 열었는데 이후 상인 농부 부동산 투자자로 일하면서

그 지역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 중 하나가 되었다고 합니다.

 

교육

어머니 엘리자베스는 교육을 무척 잘 받은 여성으로 아이들의 교육에도 무척 관심이 많았는데요.
그래서 제임스도 어려서부터 여러가지 교육을 받았죠.

아버지의 상점에서 일하며 산수와 부기를 배웠고 마을의 목사 밑에서 그리스어와 라틴어를 공부하다 마을에
있는 학교로 진학해 본격적으로 학업을 이어갔습니다.

그러다 1807년 17살이 된 제임스는 펜실베이니아 칼라일에 있는 디킨스 대학에 입학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는 대학에 입학한 지 1년 만에 학교에서 난폭한 행동으로 문제를 일으켜 정학에 이어 그만
퇴학까지 당하고 말았는데요.

하지만 다행히 기회를 얻어 다시 복학할 수 있었고 이후엔 정신을 잘 차렸는지 1809년
학교를 우등생으로 졸업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평상시 토론을 잘하고 법률에 관심이 많았던 제임스는 본격적으로 법학을
공부하기 위해 펜실베이니아 랭커스터로 갔습니다.

 

 

 

 

 

 

 

 

 

 

변호사가 되고, 전쟁에 참여하다.

그곳에서 한 변호사 밑에서 법률을 공부하기 시작했는데요.

그는 1812년에 변호사 자격을 얻어 정식으로 변호사가 되는 데 성공합니다.

그런데 바로 그 해 미영 전쟁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때 제임스는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스스로 군에 입대하고
제대할 때까지 사병으로 군복무를 했습니다. 이는 역대 미국 대통령 중 유일하게 병사신분으로 군복무를 마친
대통령으로 기록됩니다. 전쟁이 끝난 후 다시 펜실베이니아 랭커스터로 돌아와 본격적으로 변호사 일을 시작하게 된
제임스는 금세의 능력있는 변호사로 이름을 날리며 재산도 빠르게 늘리기 시작했습니다.

 

정치에 입문하다.

그러다 1814년 잘나가던 변호사 제임스는 24살의 젊은 나이에
펜실베이니아 주 하원의원의 선출되며 처음으로 정치에 발을 들이게 됩니다.

펜실베이니아주 하원의원으로 활동하던 제임스는 1820년 미국 하원의원으로
선출된 중 10년간 재선에 성공하며 5선 의원의 타이틀을 얻게 됩니다.
그리고 1824년 대통령 선거에서부터 앤드류 잭슨의 지지하며 선거운동을 돕게 되는데 1828년 제도 전 끝에
드디어 앤두리 잭슨이 대통령이 되고 이후 1831년 제임스는 러시아 주제의 미국 공사로 임명이 돼 미국과
러시아 사이의 첫 통상 조약을 협상하는 듯 외교관으로 성공적인 변신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1833년 11월 그는 다시 미국으로 돌아온 후 이듬해 미국 상원에 선출돼 10년 가까이 상원의원으로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상원의 임기가 끝날 무렵 제임스는 의회에서 가장 강력한 상원의원 중 한 사람이 되어 있었는데요. 
그는 또 다른 꿈을 꾸기
시작했죠. 바로 미국의 대통령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대통령 후보를 뽑는 경선에서 제임스 포크에게 밀리고 말았는데요. 
이후 대통령이 된 제임스
포크는 제임스를 국무장관으로 임명하게 되고 국무장관이 된 제임스는 
멕시코
전쟁으로 늘어난 영토를 가지고 영국과 협상을 벌여 국경을 정하는 오리건 조약을 체결하기도 합니다. 

 

 

 

 

 

 

 

 

사랑을 하다.

1816년 제임스는 한 무도회에 참석했다가 그곳에서 앤 캐롤라인 콜몬이라는 여성을 만나 사랑에 빠집니다.

앤은 철강 제조와 무역을 하는 거의 재벌급 집안에 딸이었는데요. 앤의 부모는 제임스를 탐탁지 않게

여겼다고  합니다. 하지만 제임스는 앤과 사랑을 이어갔고 1819년에 드디어 약혼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제임스는 앤과 약혼을 한 이후 정치와 변호사 업무로 인해 그녀와 함께 보내는 시간이 거의 없어질
정도로 바빠졌다고 합니다. 그러자 사람들 사이엔 이런저런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제임스가 돈 때문에 앤과 결혼하려고 한다 제임스가 다른 여자랑 바람이났다 뭐 이런 소문들이었는데요.

이런 얘기는 곧 앤에게도 들어갔죠.

그런 소문들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앤는 제임스에게 파혼을 선언했습니다.

 

이후의 결혼 내용.

그리고 앤은 약혼을 파혼하고 얼마 안 돼 1819년 12월 9일 약물 과다복용으로 갑자기 세상을 떠나고 맙니다.
앤의 부모는 딸의 갑작스러운 죽음의 한때는 딸의 약혼자였던 제임스가
장례식에 참석하는 것도 막을만큼 제임스를 강하게 비난했다고 합니다.

제임스는 앤이 세상을 떠난 후 행복이 내게서 영원히 사라진 것 같다며 앞으로 평생 결혼하지
않겠다고 맹세했는데요.

실제로 죽을 때까지 독신을 유지한 미국 역사상 유일한 총각 대통령으로 이름을 올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임스가 평생 교류는 하지 않고 혼자 있었던 이유에 대해선 다른 추측도 있습니다.
바로 전임 대통령이었던 프랭클린 피어스의 부통령 윌리엄 킴과 특별한 사이가 아니었냐는 것인데요.

윌리엄 킹도 제임스처럼 평생을 독신으로 있었던 때다 둘이 15년간 한 집에 살 정도로 사이가 무척 가까웠기 때문이었죠.
여튼 제임스가 평생 결혼을 하지 않은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아내가 없었던 제임스가 대통령으로 있는 동안
조카가 영부인 역할을 맡았다고 합니다.

 

 

 

 

 

 

대통령이 되다.

제임스는 이후에도 1848년 대통령 선거 1852년 대통령 선거에서 다시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로 도전했지만
번번이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이런 가운데 1853년 미국 제14대 대통령 프랭클린 피어스가 제임스를
영국 주제에 미국 대사로 임명하게 되면서 제임스는 외교관으로 유럽에 머물게 됩니다.
그런데 이 일은 제임스에게 큰 기회로 돌아왔습니다. 제임스가 공사로 해외에 파견돼 있는 동안 미국은 남북으로
갈라져 노예제 문제를 두고 큰 갈등을 겪게 된 것이었죠. 특히 1854년 프랭클린 피어스가 서명한 캔자스 네브레스카
법을 둘러싸고 남부와 북부는 극한의 갈등을 겪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민주당은 미국의 없어서

이 문제에 대해 아무런 입장을 취하지 않았던 제임스가 오히려 대통령 선거에서 승산이 있다고 판단하여
대통령 후보로 선택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1856년 제임스는 마침 휘그당의 분열로 인해 비교적 쉽게
미국의 제15대 대통령이 되는데 성공을 합니다.

 

대통령으로서의 행보.

대통령이 된 제임스는 자신의 사람들 위주로 내각을 구성해 민주당의 반발을 샀고 특히 남부 출신과 남부의 호의적인 인물들을
채우면서 북부지역 정치인들의 비난을 사게 된 것이었죠. 여기에 취임 후 얼마 안 돼 미국 대법원은 미국 역사상 가장
수치스러운 판결로 알려진 드레드 스콧 판결을 내리게 됩니다. 드레드스콧은 미주리 출신의 흑인 노예의 이름인데 이 드레드 스콧이란 흑인 노예가 주인을 따라 노예제 폐지 주인 자유주의에 왔기 때문에 이제 자신은 자유인이란 소송을 제기한 사건이었습니다.

그러자 연방 대법원은 노예는 미국의 시민이 아니기 때문에 연방 법원에 제소할 권리 자체가 생길 수 없다며 드레드 스콧의 소송을 기각해 버렸습니다. 한마디로 이 판결은 노예제도를 합법화한 판결이었죠. 이 같은 결과에 남부인들은 환호하며 반대파들을 공격하기 시작했으며 북부인 들은 법원의 시대착오적인 판결에 더욱 분노를 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때 제임스는 드레드스콧 판결을 지지하며 북부쪽 판사에 이쪽 판결을 지지하라며 은근슬쩍 압력까지 가했습니다. 사실 제임스 개인적으로는 노예제도를 반대했지만 헌법에 따라 연방정부가 마음대로 남부에 관리를 빼앗을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는데요. 무엇보다 제임스는 일단 이렇게 대법원이 판결을 내리면 모두 그 판결을 따르게 될 것이라고 쉽게 판단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판결로 갈등이 해결되기는커녕 더욱 심각해졌으며 노예제 폐지를 가치로 내걸고 출범한 공화당은 결정을
거부하겠다고 선언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면서 당시만 해도 신생정당이었던 공화당은 1858년 상원의원 선거에서
다수당의 지위를 차지하게 되며 자신들의 정치적 입지를 크게 넓히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었습니다.
바로 이시기 무명에 가까웠던 정치인 에이프레임 링컨은 일약 전국적인 유명인사로 이름을 떨치게 됩니다.
그러면서 공화당은 제임스의 의제를 거부하고 제임스는 다시 공화당 법안에 거부권을 행사하며 연방정부는 그야 말
교착 상태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그런 와중에 1860년 대통령 선거가 열리게 되는데 민주당은 노예제 문제 때문에
북부와 남부로 분열돼 한 당에서 각각 다른 후보를 지명하는 상황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 결과 공화당의 에이프레임
링컨이 큰 표 차이로 미국의 제16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는데요.

그러자 남부에선 공화당 행정부를 인정하느니 차라리 연방을 탈퇴하겠다며 1860년 12월 20일 사우스 캐롤라이나 주를
시작으로 1861년 2월까지 7개의 남부주가 연방해서 탈퇴하여 미국 남부연합을 형성하게 됩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도 제임스는 남부의 주들이 탈퇴하는 것을 막을 헌법적 권한은 없다며 반감만 했습니다.
1861년 3월 4일 에이브러햄 링컨이 제16대 대통령의 취임하고 제임스는 펜실베이니아로 은퇴를 하게 됩니다. 
그리고 얼마 후인 1861년 4월 12일 남부군이 사우스캐롤라이나의 섬터 요새에 발포를 하며 남북 전쟁이 시작되는데요.
그러자 많은 사람들은 남부주의 분리를 막지 못한 제임스에게 전쟁의 책임이 있다며 제임스를 강하게 비난했습니다.

심지어 상원은 제임스를 규탄하는 결의안 초안을 작성하기도 했으며 제임스의 초상화가 훼손되는 걸 막기 위해 국회의사당에선 그의 얼굴을 내리기까지 했죠. 이렇게 자신에 대한 비난의 목소리가 커지자 제임스는 우울증에 빠질 정도로 힘들어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1862년 자신의 변호하기 위해 반란 이전에 뷰캐넌 행정부라는 회고록을 쓰기 시작했는데요. 남북 전쟁은 자신 때문이 아니라 노예제 폐지 지지자들과 공화당원들 탓이란 내용이었습니다.
이 회고록은 남북전쟁이 끝나고 1년 후인 1866년에 출판되었지만 자신의 기대와는 달리 아무런 호응도 얻지 못했습니다.
실망한 제임스는 이후 집에서 은둔하며 친한 친구들만 만 살아가는데요.
그러다 1868년 6월 1일 78세의 일기를 끝으로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총정리

지금까지도 제임스는 남부와 북부 사이에서 중재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해 남북 전쟁에 큰 원인을 제공한
무능한 대통령 미국 역사상 최악의 대통령 중 한 사람으로 이름을 올리고 있습니다. 
대통령 제임스로서는 최악의 평가를 받고 있지만 인간 제임스는 선한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고 합니다. 
개인적으로는 노예제도를 반대했기 때문에 퇴임 후 남부에서 노예를 사들여 북부에 해방시켜주기도 했으며 도움이
필요한 친구에게 돈을 빌려주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기부도 하는 관대한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좋은 사람이지만 무능한 대통령 18세기에 태어난 마지막 대통령이자 유일한 독신
대통령 미국의 제15대 대통령 제임스 뷰캐넌에 대해 알아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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