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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완벽한 리더십의 표본으로 꼽히는 대통령 미국은 물론 전 세계에서도 가장 유명한 대통령 바로 

미국의 제16대 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입니다.
링컨이 없었더라면 오늘의 미국은 50개의 작은 나라로 나뉘어 있었을지도 모른다라는 말도 있죠.
분열된 미국을 하나로 통일한 대통령이자 남북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노예제를 폐지한 대통령.

오늘은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치를 내세우며 미국 역사에서 가장 훌륭한 대통령으로 꼽히는

제16대 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에이브러햄 링컨 ( Abraham Lincoln )

 

 

 

항목 내용
링컨의 출생 1809년 2월 12일, 미국 켄터키주 싱킹 스프링 팜
링컨의 사망 1865년 4월 15일, 미국 워싱턴 D.C.
대통령 재임 기간 1861년 3월 4일 ~ 1865년 4월 15일, 미국의 제 16대 대통령
주요 업적 남북전쟁을 끝냈으며, 미국의 화합을 지켜냈다.
후대의 평가 현재의 미국을 있게한 가장 위대한 미국 대통령.

 

 

 

 

 

 

 

 

 

링컨의 탄생

1809년 2월 12일 미국 켄터키주 하딘 카운티에 살던 아버지 토머스 링컨과 어머니 낸시 링컨 사이에서
태어난 에이브러햄 링컨.  에이브러햄이 태어난 곳은 집이라고는 방 한 칸 밖에 없는 오두막이었는데요.
아버지 토마스는 한때 부농이었으나 파산한 뒤 에이브러햄이 태어난 이후엔 내내 가난하게 살았다고 합니다.

때문에 에이브러햄은 제대로 된 교육은커녕 어렸을 때부터 집안일이나 농사일을 도와야 했습니다.
심지어 품사스 벌기 위해 다른 집의 일까지 해 마을 사람들이 얘를 너무 부려먹는 거 아니냐고 흉을 볼 정도였다고 

합니다. 아버지 토마스는 문맹이었던 데다 너무 가난했기 때문에 먹고살기 위해서는

무조건 육체노동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어려워지만 포기하지 않았던 공부

그래서 에이브러햄이 책을 읽거나 공부를 하고 있으면 저놈이 일을 하기 싫어 꾀를 부리는구나라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런 아버지와 달리 에이브러햄은 교육만이 힘든 육체노동을 벗어날 수 있는 길이라 생각하고 일하는 틈틈이 독학으로
공부를 했습니다.  또 아무리 집에서 먼 곳이라도 누군가 책을 가지고 있다는 소문이 들리면 책을 빌리러 가곤 했다고 합니다.

그러다 1816년 에이브러햄의 가족은 토지분쟁으로 인해 인디애나주 페리카운티로 이사를 가게 됩니다.
그러던 1818년 에이브러햄이 10살이 됐을 때 그의 어머니는 당시 남부 인디애나 저녁을 휩쓴
이상한 우유병에 걸려 갑자기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 우유병은 독초를 먹은 소의 우유나 고기를 먹어서 생긴 병이라는 것이 밝혀졌죠.
어머니가 그렇게 세상을 떠나고 2년 후 아버지는 어린 시절 친구였던 사라부시와 재혼을 하게 됩니다.

새어머니 사라에게도 이미 자식이 셋이나 있었지만 다행히 새어머니 사라는 매우 현명하고 따뜻한 여성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에이브러햄은 새어머니를 천사 엄마라고 부를 정도로 믿고 따랐으며 사라 역시 에이브러햄을 친자식처럼 보살폈습니다.
게다가 사라는 유난히 총명했던 에이브러햄의 재능을 알아보고 계속 책을 읽고 공부를 할 수 있도록 응원하고 격려를 해주었다고 합니다. 또 사라는 유머감각도 뛰어났다고 전해지는데 훗날 정치인 에이브러햄이 보여준 특유의 위트와 유머 감각은 바로
새어머니에게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아버지는 시간만 나면 책을 읽는 에이프라임을 영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의 생각을 바꾸게 된 한 가지 사건이 일어나게 됩니다.
바로 그를 전혀 읽지 못했던 아버지가 사기계약을 당할 뻔한 것을 에이브러햄이 막아준 것이었죠. 아버지는 자신의 땅 중
일부를 누군가에게 팔기로 하고 계약서에 서명을 하기로 했는데 그때 마침 에이브러햄이 계약서를 자세히 살펴보니
땅의 전부를 파는 곳으로 써져 있었던 것인데요. 하마 타면 땅 전부를 날릴 뻔했던 아버지는 이후로는 에이브러햄이
책을 읽는 것을 봐도 잔소리를 하지 않았습니다.

 

 

 

 

 

 

 

 

 

 

계속된 불행

1828년 20살이 된 에이브러햄에게 또다시 큰 불행이 찾아왔습니다. 바로 하나뿐인 친누나 세라가 결혼 후
아기를 낳다 22살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게 된 것입니다.  어렸을 때부터 사람이 거의 없던 척박한 

시골 개척지에서 자란 둘은 서로가 유일한 친구였을 정도로 유난히 사이가 돈독한 남매였는데 이렇게 어머니에 

이어 누나까지 세상을 떠나며 에이브라임은 큰 충격과 슬픔을 겪어야 했다고 합니다. 1830년 에이브러햄의 가족은
다시 일리노의 주로 이사를 가게 되었습니다. 아버지처럼 농사꾼이 될 마음이 없었던 에이브러햄은 집을 나와
그때부터 여러 가지 일을 전전하기 시작했는데요. 독립 후 에이브러햄이 하게 된 일은 뉴올리언스까지 짐을 

운반하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이때 에이프레임은 자신의 인생에 큰 영향을 주는 한 장면을 목격하게 됩니다. 

바로 노예 경매장에서 흑인 어머니와 어린 자식을 강제로 갈라놓으며 울부짖는 아이와 어머니를 보고 큰 충격을 받게 된 것이었죠.

 

프로레슬러 링컨.

이후 에이브러햄은 일리노이주 뉴세일럼에 정착해 잡화점 직원 우체국 측량기사 등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일했습니다. 
그러면서 이시기 에이브러햄은 특이하게도 프로 레슬러로도 활동을 하게 됩니다.

놀라운 건 그냥 프로레슬러가 아니라 링 위를 평정했던 그야말로 전설적인 프로레슬러였다는 사실입니다.
사실 17살 때 이미 키가 193cm까지 자랐던 에이브러햄은 어렸을 때부터 육체노동을 많이 해서인지 
다부진 몸에 체력도 무척 좋았다고 합니다.

특히 힘이 엄청나게 좋았던 것으로 소문이 자자했는데 그래서인지 어렸을 때부터 도끼질을 엄청 잘해 남들보다
몇 배는 빨리 장작을 패기도 했으며 위협을 하는 강도나 동네깡패들을 만나 한번에 패대기 쳐버린 적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193cm의 장신에서 나오는 압도적인 피지컬을 바탕으로 300번 넘는 경기를 치르며 단 한 번의 패배만 기록할 정도로
놀라운 실력을 보여준 프로레슬러 에이브러햄 링컨 그래서 지난 1992년엔 미국 프로레슬링 명예의 전당에도 이름을 올리기도 
했습니다.

 

 

 

 

 

 

 

 

전쟁에 참전한 링컨

그러다 1832년 미국과 아메리카 원주민 사이에 블랙호크 전쟁이 일어나자 에이브러햄은 자원봉사자로
군에 입대를 하게 됩니다. 이때 주변사람들의 추천으로 그 지역 대장으로 선출되었는데요.
군복무 기간은 매우 짧았지만 뛰어난 전략과 전술을 보여줬다고 합니다. 이때의 군 경험은 훗날 남북전쟁을
지휘할 때 영향을 주기도 했습니다. 짧은 군복무를 마치고 다시 일반인으로 돌아온 에이프라임은 친구와

동업으로 잡화점을 운영하게 됩니다.

 

계속된 실패

하지만 얼마되지 않아 쫄딱망에 많은 빚을 지고 말았는데요. 똑똑해 보이는 젊은 친구가 그리된 게 안타까웠는지 주변 사람들은
에이브러햄에게 주의회 선거에 나가보라고 추천을 합니다. 그렇게 1832년 에이브러햄은 주의회 선거에 출마하게 되죠.

하지만 13명 중 8위로 낙선을 하게 되고 다시 이를 구해야 했던 에이브러햄은 친구에게 돈을 빌려 또다시 사업을
하지만 이번에도 역시나 결과는 폭망하고 이때 생긴 빚을 갚는데만 무려 17년이 걸렸다고 합니다.

 

 

 

 

 

 

 

정치를 시작한 링컨.

여하튼 그 사이 1834년 다시 주위의 선거가 열리게 되는데 이번에도 역시 지인들의 추천으로 에이프레임은 선거에
출마했고 다행히 이번엔 일리노이주 주 의원에 당선되었습니다. 그때 에이브러햄의 나이 26세였습니다.

 

변호사가 되다.

막상 주 의원이 되고 보니 에이브러햄은 자신의 직업에 한계를 느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는 어린 시절부터 관심이 있었던 법학을 독학으로 공부했고 결국 1836년 변호사 시험에 합격했습니다.

이후 에이브러햄은 일리노이즈 스프링필드로 옮겨 본격적으로 변호사 활동을 이어가게 되죠. 
가난한 집 출신의 별다른 배경도 없었던 에이프로엠은 변호사 초기에만 하더라도 일감이 별로 없었다고 합니다.

그러다 집안도 좋고 인맥도 좋던 변호사와 동업을 하며 다양한 사건을 맡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나중엔 큰 정치적 사건을 맡을 정도로 변호사로서의 명성도 높아지고 수입도 껑충 뛰었다고 합니다.

 

 

 

 

 

 

 

 

 

 

 

 

결혼한 링컨.

1839년 12월 에이브러햄은 켄터키주 상류층 가문 출신의 9살 연하 메리토드라는 여성을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됩니다. 사교적이고 화려한 것을 좋아했던 메리는 에이프로햄과는 성격도 정반대였습니다.
게다가 메리의 전 남자친구는 훗날 에이브러햄의 정적이 되는 민주당의 거물 정치인 스티븐 더글러스였다고
합니다. 메리의 집에서는 가난한 집 출신인 에이프라임과의 결혼을 탐탁지 않게 여겼지만 둘은 1842년 결혼을 하고
아이 넷을 가진 가정을 꾸리게 됩니다.

 

계속된 비극.

엄한 아버지 밑에서 자란 한을 풀기라도 하듯 아이들에게 유난히 다정했다는 에이브러햄 링컨 하지만
그에겐 비극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장남을 제외하곤 모두 어린 나이에 일찍 병으로 세상을 떠난 것인데요.
바로 이 때문에 아내 메리는 평생을 우울증과 히스테리 편집증에 시달렸으며 에이브러햄 역시 아들의 죽음과 아내의
심각한 정신 상태로 인해 큰 고통을 겪어야 했습니다.

그런 와중에 공처가였던 에이브러햄은 아픈 아내를 낫게 하기 위해 헌신을 다했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결국 메리는 남편 에이브러햄이 암살당하고 막내아들이 병으로 세상을 떠난 후 정신질환 판정을 받고 이후 정신병원에
보내질 정도로 불행한 삶을 살다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게다가 남북전쟁 당시 국가 예산이 빠듯하던 시기에 사치를 부리고 남부에 살던 친정 동생을 불러 백악관에 묵게 하는 등 적절하지 못한 행동을 자주 보임으로써 메리는 미국 역사상 가장 인기 없는 영부인으로도 이름을 올리게 됩니다.
그런데 사실 아내 메리뿐 아니라 에이브러햄 역시 평생을 만성 후유증에 시달렸다고 전했습니다. 
그가 남긴 시나 연설 편지를 보면 죽음에 대한 언급이 가득 차 있으며 혹시나 자기가 정신을 놓는 건 아닐까 두려워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20대 이후부턴 술을 한 번도 마시지 않을 정도로 절제된 삶을 살았으며 자신의 우울증을 이겨내기 위해 유머나 농담을
더 자주 사용하곤 했다고 합니다.

 

 

 

 

 

 

 

 

 

 

정치계에서의 행보

1834년부터 휘그당 소속으로 일리노이주 의원에 연달아 당선되며 주 의원으로 활동하던 에이브러햄.

그런데 1838년 일리노이 주의장에 도전했지만 낙선 1840년 대통령 선거인단에 도전했던 낙선 1844년

연방 하원의원 선거에서 탈락하는 등 연달아 고배를 마시게 됩니다. 그러다 1846년 38살의 나이로 겨우겨우 미국

하원의원의 당선되는 데 성공하는데요. 하원으로 있던 당시 에이브레임은 나라를 전쟁으로 몰고 간 제임스 포크

대통령의 멕시코 전쟁을 강하게 비난하고 나섰습니다. 이때 일리노이주 유권자들에게 인기를 잃게 되고 결국

1849년에는 재선에 도전하지 않고 다시 변호사로 돌아가게 됩니다.

계속된 실패.

그렇게 변호사로 살아가다 1854년 미국 상원의원 선거에 출마했으나 낙선, 1856년 부통령 후보 지명 전에 출마했으나 
낙선, 1858년 상원의원에 다시 출마했으나 또 낙선, 정치인으로 엘리트 코스는커녕 낙선왕으로 가시밭길만 걷게 되죠.

하지만 1858년 상원의원 자리를 둘러싸고 아내의 전 남자친구였던 민주당 스티븐 더글라스와의 대결은 무명에 가까웠던
에이브러햄을 일약 전국구스타로 만들어 놓게 됩니다.

1846년 에이브러햄은 38살의 나이로 겨우겨우 미국 하원에 당선된 이후로 나서는 선거마다 족족 낙선 낙선 낙선만 했습니다.
그런데 아내의 옛 남자 친구이자 당시 유명 정치인이었던 민주당 스티븐 더글로스와 대결한 1858년 일리노이즈 상원의원 선거가 
비록 에이브러햄의 패배로 결론이 났지만 토의 문제에 단호히 반대하는 입장을 밝히며 에이브러햄은 노예제를 반대하는 
대표 정치인으로 우뚝 서게 됩니다.

그리고 이때 두리 버린 공개토론은 지금까지도 미국 역사에서 명토론으로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당시에 큰 이슈는 새로 연방의 편입된 주들에게 노예제를 금지할 것이냐 말 것이냐였는데 스티브는 주민들이 스스로 투표를 
해 결정하게 하자는 쪽이었고 에이브러햄은 투표를 하더라도 노예제를 허용하면 안 된다는 쪽이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에이브러햄은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태어났지만 백인과 흑인이 사회적인 면에서는 결코
동등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이 말은 꼬리표처럼 그를 따라다니며 비판을 받게 만들었죠.

 

 

 

 

 

 

 

 

 

 

 

인기를 얻다.

에이브러햄이 이렇게 난 진짜 속리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흑인 노예에 대한 에이브러햄의

생각이나 입장은 점차 변화했고 진화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실제로 에이브러햄은 노예제에 대해
급진파라기보다는 점진적인 개혁을 추구하는 현실 정치인의 가까웠다고 합니다. 

다만 이때도 에이면 기회의 평등을 강조하며 경제적 자유가 정치적 자유의 초속이 될 수 있기 때문에
뇌의 경제를 먼저 타파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비록 선거에선 패배했지만 스티븐 더글러스와 벌인
공개토론은 에이브러햄의 단숨에 스타로 전국구 정치인으로 발돋움하게 만들었죠.

대통령이 되다.

에이브러햄은 그 여세를 몰아 1860년 5월 18일 대통령 후보를 뽑는 공화당 전당 대회에서 후보로 선출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같은 해의 11월 6일 마침내 미국 제16대 대통령의 당선이 됩니다. 그의 나이 52세 공화당의 
첫 대통령으로 이름을 올린 순간이었습니다.

그렇게 1861년 3월 4일 무사히 취임식을 치르게 된 제16대 대통령 에이프라임 링컨 이때도 에이브러햄은
"나의 최고의 목적은 연방을 유지하여 이를 구제하는 것이지 노예
제도의 문제는 아니다."라는 취임사를 발표하기도 합니다.

 

 

 

 

남북 전쟁이 발발하다.

에이브러햄이 대통령의 취임할 당시 이미 남부 7개 주가 연방을 탈퇴해 남부연합을 형성하고
에이프레임과 경쟁했던 남부정치인 제퍼슨 데이비스를 남부연맹의 대통령으로 선출까지 한 상황이었는데요.
결국 에이브레임이 대통령이 된 지 한 달 만인 1861년 4월 12일 남부군이 찰스턴 항구의 섬터요새에
발포를 하며 4년 동안 약 60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처절한 미국의 남북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전 잰 상황&  노예해방선언을 발표하다.

전쟁이 시작되자 남부의 4개 주가 추가로 남부연맹에 합류했습니다. 전쟁 초기 한참 동안 에이프레임이 이끄는 북부의
군대는 계속 전투에서 패배를 하는 등 좋지 않은 상황을 맞이하게 됩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전쟁은 북부군에 유리한 형세를 띠기 시작했는데요.
특히 1862년 9월 22일 앤 티탐 북부군이 승리를 거두며 에이브러햄은 전쟁의 목표를 바꿀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게 되었죠.
그러면서 공식적으로 남북전쟁의 대의를 연방을 지키기 위한 전쟁에서 노예제 폐지로 전환하며 1863년
1월 1일 그 유명한 노예 해방선언을 발표하게 됩니다. 주 내용은 반란 상태에 있는 주의 노예를 전부 해방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물론이 노예 해방선언으로 실제로 모든 노예를 해방시킨 것은 아니었습니다. 당시 북부에는 노예제가 없었고
노예제가 있는 남부에는 해방선언이 효력을 미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에이브러햄도 이를 모르는 것은 아니었지만 앞으로 노예제를 없앤다는 상징적인
의미였고 이 상징성은 결국 남북 전쟁의 중요한 전환점으로 자리하게 됩니다.
실제로 이 노예 해방선언으로 수많은 흑인 남성들이 북부 연합군의 합류해 함께 전쟁을 치렀습니다. 
전쟁이 끝날 무렵엔 거의 20만 명의 흑인이 북부군에 합류했었다고 합니다.

에이브러햄은 노예 해방선언을 발표한 후 노예제의 전면 폐지를 헌법에 조문화하는 작업에 착수했는데 이는
해방된 뇌의 신분을 영구적으로 보장하는 헌법적인 조치로 미국 수정헌법 제13조가 바로 그것이라고 합니다.

에이브러햄은 전쟁이 끝나기 전이 수정헌법 제13조를 통과시키기 위해 부단히 도 애를 썼습니다.
매일매일 자신의 정적은 물론 반대파 급진파 등을 만나 교활한 정치인이라는 소리까지 들어가며 설득하고 타협했습니다.
타협 결과 수정한 통과를 위해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났다에서 법 앞에 평등으로 후퇴하긴 했지만
1865년 1월 31일 겨우 투표 차이로 수정헌법 제13조가 가결되며 미국의 역사를 바꿔놓게 되죠.

한편 전쟁이 한창이던 1863년 7월 1일에서 3일 사이 게티즈버그 인근에선 남북전쟁 당시 가장 치열했던 전투로 꼽히는 
게티즈버그 전투가 일어났습니다. 밀리고 있던 북군이 바로 이곳에서 승리함으로써 남북 전쟁의 향방을 가룬 전투로 
평가받는데요.  하지만 이와 동시 사망자 8000명을 포함해 총 5만 1000명이나 되는 사상들을 내서 이 엄청난 인명피해에
북부 사람들도 큰 충격을 받게 됐다고 합니다.

그러자 1863년 11월 에이브러햄은 게티즈버그 묘지에서 전사자를 추도하는 게티즈버그 연설을 했습니다. 
건국의 아버지 독립선언서 인간평등 추구 등을 상기시키며 다시 한번 전쟁이 진정한 목적과 의미를 설득력 있게 전달하는데
바로 여기에서 그 유명한 문구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가 나오게 된 것이죠.

 

 

 

 

 

전쟁이 북부의 승리로 끝나다.

1864년 3월 에이브러햄은 율리시스 그랜트를 북부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하게 되는데 이후 그랜트 사령관이
승리를 연달아 거머쥔 덕분에 1864년 11월 에이브러햄은 재선에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임기가 시작된 직후인 1865년 4월 9일 드디어 남부가 항복을 함으로써

치열했던 전쟁은 막을 내리게 됩니다.

 

전쟁 이후

전쟁이 끝난 다음날 백악관 근처엔 미국 만세 링컨 만세를 외치는 축하행렬이 주를 이었고 에이브러햄은
여러 차례 현관으로 나가 감사 인사를 했다고 합니다.

링컨은 전쟁 지도자로서 탁월했으며 정치 지도자로서도 놀라운 리더십을 보여주었습니다. 
대통령의 취임할 당시부터 내각에 필요하다고 생각되면 정당이나 이념에 상관없이 등용해 중요한 자리에 앉혔습니다.

그중엔 국방장관이 된 에드윈 스탠턴도 있는데 그는 에이브러햄이 정규 교육을 받지 못한 것을 비난하고
"에이브러햄이 당선되면 국가적 재난이다."라고 막말을 할 정도로 에이브러햄을 싫어했던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참모들은 당연히 그가 국방장관이 되는 것을 반대했지만 에이브러햄은 오히려 이렇게 얘기했는데요.
"에드윈이 나를 무시한 사람은 맞다, 하지만 나를 수백 번이고 무시하면 어떠냐 에드윈은 사명감이 투철한 인물이고 국방장관에 적임이다."  그리고 결국 그를 국방장관에 앉혔습니다. 처음엔 시큰둥하기만 했던 에드윈도 나중엔 에이브러햄에게 진심을 담아
직언하는 가장 충실한 조언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에이브러햄의 리더십은 남북전쟁 중에도 빛이 났습니다. 한 번은 북부군 사령관 맥클린 장군이 공을 세우자 에이브러햄은 
그를 응원해 주기 위해 전선 차량부를 찾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몇 시간을 기다렸건만 맥클린 장군은 피곤하다며 그냥 잠을
자러 가버렸다고 합니다. 그러자 참모들은 격노하며 당장이라도 그를 해임하자고 했지만 " 맥클린 사령관은 이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데 꼭 필요한 사람이다. 그가 이 전쟁을 빨리 끝낼 수만 있다면 이렇게 기다리는 것은 물론이고 그의 군화를 닦고 그의
말고삐도 잡을 수 있다 "라고 얘기했다고 전해집니다.

 

 

 

 

 

 

 

 

 

이후의 그의 대단함.

남북 전쟁이 끝난 후 에이프로 햄은 반으로 갈라진 남과 북을 하나로 묶기 위해 미국이 하나가 되는 정책들을
과감히 시행했습니다. 남부의 주에 마치 점령군처럼 북부 출신 관료들을 파견하는 정책을 반대하고 남부에 주는
남부 사람들이 스스로 주정부를 세우게 한 것이죠. 또 백인과 해방된 흑인 간의 새로운 관계 정립을 위해

노력했으며 교육만이 흑인들이 사회에 적응하고 자립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들어 줄 것이라며 흑인들의

교육에도 깊은 관심을 가졌습니다. 전쟁이 끝난 지 5일째가 되던 아침 에이브러햄은 장관들과 함께 회의를 하는 자리에서 "이미 전쟁은 끝났으니 조국의 통합과 조화를 원한다면 남부를 미워하고 복수하겠다는 마음을 버려야 한다."
고 강조했습니다.

 

암살당하다.

그리고 바로 그날 밤 에이브러햄은 아내와 함께 연극을 보러 갔는데요.
연극이 시작되고 1시간쯤 지났을 무렵 한 남자가 조용히 숨어들었습니다.
잠시 후 총소리와 함께 에이브러햄은 앞으로 쓰러지고 말았는데요.
그리고 끝내 의식을 회복하지 못한 채 이튿날인 1865년 4월 15일 에이브러햄은 일기를 끝으로 세상을 떠나게 되죠.
참고로 에이브러햄을 쏜 남자는 존 윌크스 부스라는 배우였는데 그는 노예제 폐지를 반대하던 남부 동맹
지지자로 에이브러햄을 살해한 후 시골 마을에 숨어있다 12일 만에 발각돼 군인들에게 총을 맞아 숨졌다고 합니다.

 

 

 

 

 

 

 

총정리

에이브로햄 링컨 그는 언제나 훌륭한 사람 위대한 위인 리더십의 표본으로 항상 최고의 자리에 이름을 올리고 있지만
돌아보면 굽이굽이 그의 삶은 역경과 슬픔으로 가득했습니다.
지질히 도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어머니를 잃고 누나를 잃고 사랑하는 아들들을 차례로 읽고 늘 우울증과 신경쇠약으로
고통을 받아야 했는데요. 하는 사업들도 번번이 실패하고 나가는 선거마다 대부분 낙선을 경험하기도 했죠. 
하지만 미국 역사상 그 어떤 대통령도 이보다 더 큰 위기를 직면한 적이 없으며 그 어떤 대통령도 이만큼 성취한 적이 없다
라는 누군가의 얘기처럼 그는 남북 전쟁이라는 엄청난 국가적 위기를 극복하고 통일된 미국을 지켜냈으며 완벽하진 않지만
노예제 폐지를 위해 부단히 노력한 인물입니다.  지금까지 그 이름 자체로 자유와 평등 그리고 민주주의의 상징이 된 
미국의 제16대 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에 대해 알아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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