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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 전쟁 당시 북군을 이끈 총사령관 100백만 대군을 이끌어 전쟁을 승리로 이끈 전쟁 영웅.
그리고 그 공로를 인정받아 50달러 집회의 모델이 되기도 한 주인공.
바로 미국의 18대 대통령 율리시스 그랜트입니다.
그런데 최고의 장군, 최악의 대통령이란 이야기도 있을 정도로 대통령으로서의 평가는 그리 좋지 않습니다.
오늘은 남북전쟁의 상징적인 인물 미국의 제18대 대통령 율리시스 심슨 그랜트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항목 | 내용 | |||||
그랜트의 출생 | 1822년 4월 27일, 미국 오하이오주 포인트플레전트 | |||||
그랜트의 사망 | 1885년 7월 23일, 미국 뉴욕주 마운트맥그래거 | |||||
대통령 재임 기간 | 1869년 3월 4일~ 1877년 3월 4일 | |||||
주요 업적 | 남북 전쟁을 승리로 이끔. | |||||
후대의 평가 | 대통령으로서는 무능력함. |
율리시스의 어린 시절
1822년 4월 27일 미국 오와이오주 포인트 플레즌트 가죽 가공업자 살아가던 아버지
제시 그랜트와 어머니 한나 심슨이 낳은 육 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난 율리시스 그랜트 율리시스는 고전 소설인
오디세이를 좋아했던 아버지가 등장 인물의 이름을 따서 만든 이름이었는데 율리시스는 하이럼 율리시스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게 됩니다. 하지만 그는 하이럼이라는 이름을 싫어해 자신의 이름을 율리시스 h 그랜트라고 적곤 했습니다.
훗날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할 때 율리시스를 임명한 하원 의원이 실수로 하이럼 대신 어머니의 결혼전 성 인 심슨을 사용하는 바람에 율리시스 심슨 그랜트라고 기재하는 일이 벌어집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이후 율리시스는 자신의 이름을 율리시스 심슨 그랜트를 계속 사용했다고 합니다. 율리시스는 어렸을 때부터 유난히 예민하고 내성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누구도 율리시스가 전장을 누비는 군인이 될 것이라곤 상상도 못 했다고 합니다.
아버지는 장남이었던 율리시스가 자신의 뒤를이 이어 가업인 가주기를 물려받기 원했지만 율리시스는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의 일을 하지 않겠다고 봉헌했습니다. 가죽이 벗겨진 동물의 시체를 보는 것도 끔찍했고 가죽 공장에서
나는 피 냄새도 너무 싫었기 때문이죠. 하지만 이런 율리시스도 유난히 좋아한 것이 있었으니 바로 말이었습니다.
승마의 놀라운 재능을 보였음 물론 마을에서 이름을 날릴 정도로 다루기 힘든 말들도 무척 잘 다뤘던 것입니다.
어린시절의 성장.
1839년 율리시스의 아버지는 율리시스가 자신의 뒤를 잇는 사업가가 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웨스트포인트에 있는
육군사관학교에 에 입학시키려고 했습니다.
워낙 내성적이고 조용했던 율리시스는 처음엔 이런 아버지의 제한을 거부하지만
계속된 아버지의 설득에 결국 사간 학교에 진학을 하게 되는데요.
자신의 의지가 아닌 아버지의 권유로 육사에 들어가 그런지 처음 학교를 다닐 땐 그리 큰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으며
지각도 자주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때도 말타기 실력만큼은 타의 주종을 불허할 정도로 탁월했습니다. 1843년 22살에 율리시스는 39명의 생도 중
21등 졸업을 한 뒤 다른 졸업생들과 마찬가지로 바로 군복무를 시작했습니다.
이때만 해도 자신은 4년 간의 의무 복무를 마치면 바로 제대할 것이라고 마음먹고 있을 정도로 군인이 되는 걸
쏙 좋아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다.
여하튼 중위로 임관하여 미주리주의 보병 중대에 배정된 율리시스는 어느 날 그곳에서 사관학교의 룸메이트였던
한 친구의 집을 방문했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자신의 운명의 상대를 만나게 되는데요.
바로 룸메이트의 여동생 줄리아 덴트 였죠. 율리시스와 줄리아는 금세 사랑에 빠졌고 1844년에 둘은 결혼을
전제로 한 약혼까지 하게 됩니다. 하지만 둘이 결혼식을 올리기 전인 1846년 멕시코 전쟁이 시작되면서 율리시스는 사랑하는 줄리아를 뒤로하고 전쟁에 참전하게 됩니다.
그런데 사실 알고 보면율리시스는 철저한 반전주의자였습니다. 위기에 처하지 않는 한 전쟁을 해서는 안 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는데요. 그래서 멕시코 전쟁은 강한 국가가 약한 국가를 상대로 버린 가장 부조리한
전쟁이라며 신랄하게 비판하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이런 자신의 신념과는 상관없이 국가의 부름을 받고 멕시코 전쟁에 참전하게 된 율리시스 그런데 또 아이러니한 건 전쟁이나 군인을 싫어하던 자신의 뜻과는 상관없이 두 번이나 표창을 받을 정도로 군인으로서 뛰어난 자지를 보였다는 것입니다. 1848년 멕시코 전쟁이 끝난 후 율리시스는 미주리주 세인트 루이스로 돌아가 드디어 줄리아와 결혼을 했습니다.
결혼 생활
줄리아는 켄터키주 출신으로 아버지가 노예 주였는데 율리시스의 아버지는 강경한 노예 폐지 론자로 처음엔 결혼 반대가
있기도 했죠 결혼하고 얼마 후 율리시스는 집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발령이 나면서 가족과 떨어져 혼자 생활을 하게 되는데요.
여기에 설상가상으로 전쟁이 끝난 후 경리장교를 하게 되었습니다. 급여도 적고 진급도 너무 느려 이로 인해 우울증까지
걸리게 된 율리시스는 괴로움과 외로움을 잊기 위해 술을 마시기 시작했고 결국 알코올 중독까지 걸리게 됐다고 합니다.
이로 인해 율리시스는 군법 회의에까지 회부가 됐고 1854년에 33살의 나이로 육군에서 전역하게 됩니다.
전역 후 민간인 신분으로 미주리주의 가족에게 돌아간 율리시스는 장인이 준 땅에 작은 집을 짓고
감자나 옥수수 귀 등을 심어 농부로 변신을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농사는 뜻대로 잘 되지 않았고 1858년 가을엔 율리시스가 말라리아가 걸려 거의 농사를 포기할 지경에 이루고
말았죠. 그러자 장인은 일을 부려 먹으라며 노예를 주기도 하는데 차마 노예에게 일을 시킬 수 없었던
율리시스는 그 다음해 봄에 노예를 풀어주고 결국 농장은 망하게 됩니다.
이후 부동산 중계인 집세 징수원 장작 사업 등에 도전했지만 모두 실패하고 경제적으로 큰 어려움을 겪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힘든 상황에서도 율리시스는 가족에게 늘 다정하고 헌신적인 가장이었다 합니다.
심지어 가족의 크리스마스 선물을 사기 위해 어느 날은 자신의 시계를 전당포에 팔기까지 했죠.
아내 줄리아 역시 남편이 계속해서 사업을 말아먹는 와중에도 아이들에게 늘 아버지는
완벽한 사람이라고 얘기할 정도로 부부 사이는 무척 좋았다고 합니다.
그러다 결국 1860년 율리시스는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아버지에게 sos 치게 됐고 자신이 그렇게 하기 싫어했던
아버지의 가죽 가게에서 점원으로 일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전쟁에 참전하다.
1861년 4월 12일 비극의 남북 전쟁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때 율리시스는 스스로 자원해 군입대를 했는데요.
전쟁을 싫어하던 그였지만 연방이 무너지는 것을 국가적 위기로 생각했기 때문에 내린 결정이었습니다.
대령 계급장을 달고 일리노이주의 한 연대를 지휘하게 된 율리시스는 오합지졸이 병사들을 훈련시켜 금세 정예부대로
탈바꿈시켰다고 합니다. 그리고 1862년 2월 자신의 군대를 이끌고 테네시의 포트 헨리와 포트 도넬슨 ES 연방의
첫 번째 승리를 가져오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때 율리시스는 항복의 조건을 묻는 정에게 완전하고 무조건적인 항복을 제외하고는 어떤 조건도 받아들일 수 없다라면 무조건 항복이란 별명을 얻게 됩니다.
전쟁에서의 활약
노련한 전술과 대담한 작전으로 지휘관으로서의 영향을 유감 없이 발휘해 몇 달 만에 장군으로 진급한
그는 1863년 7월엔 미시시피주 빅스버그 시를 함락시키자 남부 군이 장악한 요새를 무너뜨리기도 합니다.
한마디로 율리시스는 타고난 군인이었고 전략적으로 뛰어날뿐 아니라 인내심과 뚝심도 매우 강해 전투에서 저도 겁을
먹거나 후퇴하지 았고 끈질기게 물고 늘어져 끝내 승리를 이뤄냈다고 합니다.
그러던 1864년 3월 에브라함 링컨 대통령은 그를 백만 대군을 지휘하는 북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했습니다.
율리시스는 게티즈버그 전투 이후 사기가 꺾인 남부군의 몰아붙여 드디어 1865년에 버지니아주 에포 매톡스
ES 남북은 총사령관 로버트 리의 항복을 받아냄으로써 4년간의 남북 전쟁을 종식시켜 버렸습니다.
덕분에 율리시스는 전쟁 영웅으로 더욱 이름을 높일 수 있었죠. 한편 에이브라함 링컨 대통령의 사망으로 앤드류 존슨이
대통령이 되었는데 이후 탄핵을 당하는 바람에 재선 가능성이 없어지자 여당이었던 공화당은 율리시스를 대통령
후보로 내세웠습니다.
대통령이 되다.
그렇게 1868년 율리시스는 전쟁 영웅이라는 타이틀을 등에 업고
미국의 제 18대 대통령으로 당선이 되는 데 성공했습니다.
1869년 율리시스는 당시 기준으로 보면 역대 최연소 대통령이었습니다. 48세의 젊은 나이에
미국의 새로운 대통령이 된 것인데요. 하지만 그가 대통령이 된 시기까지만 해도 미국은 남북 전쟁에 유증을 알고
있던 시기로 여전히 인종 차별이 심하게 있었으며 빈부 격차와 같은 많은 사회적 문제들이 즐비해 있었습니다.
대통령이 된 율리시스는 남북의 평화적인 화해를 목표로 삼고 남북 쪽 지도자들에 대한 사면을 지지하는 한편
흑인 노예들의 인권을 보호하기 위해서도 노력을 했습니다.
대통령으로서의 행보
특히 1870년에 미국 수정헌법 15조를 통과시키며 흑인 남성들의 투표를 허용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율리시스는 한 가지 큰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바로 인사 문제였는데요.
능력이나 공직 경험이 있는 사람들을 쓰지 않고 너무도 순진하게 군인 시절 참모나 부하 등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는 사람들을 고의지게 기용한 것이었습니다.
율리시스 개인만 보면 양심적이고 강직한 인물이었지만 기용된 측근들 중 일부가 공공연하게 뇌물을 받아 챙겼고
이로 인해 대규모 금융 스캔들까지 발생하게 되죠. 한마디로 믿었던 이들에게 제대로 뒤통수를 맞은 율리시스 하지만
측근들의 이런 행태를 제대로 파악조차 하지 못했다는 점 역시 무능한 대통령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꼴이 되었고 그 결과
율리시스 행정부는 미국 역사상 가장 부패한 행정부로 평가 받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정치 스캔들 속에서도 율리시스는 1872년 재선에서 압승으로 다시 대통령에 당선하여
두 번째 임기를 시작하게 됩니다. 두 번째 임기는 더 만만치 않았습니다. 남부에서는 공공연히 흑인들의 시민권을
박탈하는 일이 일어났고 또 KKK 단 같은 흑인을 괴롭히는 테러 단체가 기승을 부렸으며 서부에서는 백인들의
탄압을 저항하는 아메리카 원주민의 무장 분기가 이어지고 있었던 겁니다.
그런 와중에 1873년엔 경제 불안까지 일어났습니다. 이후 5년 동안 18,000 개 이상의 기업이 문을 닫고 수천 명의 근로자가
실직했을 지지율도 확 떨어지게 됩니다. 원래는 삼선 대통령까지 고려하기도 했지만 율리시스는 1875년
대통령직을 은퇴할 것이라고 선언해 버렸죠.
그렇게 1877년 그는 두 번째 임기를 끝으로 백악관을 떠나게 됩니다.
물론 8년간의 재임 기간 동안 성과도 제법 있었습니다. 흑인이나 아메리카 원주민들을 위한 정책 공무원 개혁 등 그 전까지는
하지 않던 새로운 정책들을 추진했으며 외교 정책을 통해 영미 관계를 계속 시키기도 했습니다.
또 법무부 기상국 등의 설립을 승인하고 최초의 국립공원인 옐로우스톤을 포함해 국립공원 시스템을 확립하는 등 전후
미국의 재건을 위해 노력했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율리시스는 미국을 분열의 위기에서 구하고 재건의 기반을 닦았다는 점을 인정받아 미국 50달러 집회의 모델이 될 수 있었습니다.
이후의 여행
1877년 백악관에서 물러난 율리시스는 아내와 함께 2년 동안 전 세계를 여행하게 됩니다.
율리시스의 명성은 외국에도 널리 알려져 있어 가는 곳마다 큰 환영을 받았다고 하는데요.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 독일의 비스마르크 왕자 일본의 천왕 바티칸의 교황을 만나고 러시아 중국 이집트 등까지도 방문했습니다. 그렇게 율리시스는 아시아와 아프리카 중동을 방문한 첫 번째 미국 대통령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세계일주 당시 각 나라에서는 예우 차원에서 율리시스에게 사열을 해 주었는데 그때마다 율리시스는
난 군대라는 걸 보는 것만으로도 고통스럽다면 대놓고 사열을 거부하기도 했습니다.
세계 일주를 잘 마치고 돌아온 율리시스는 세계적 인기를 바탕으로 공화당으로부터
1880년 대통령 선거 출마 제안을 받는데요. 그렇게 삼선에 도전하기로 마음먹지만 최종 후부를
선정하는 가운데 공화당이 율리시스 대신 제임스 가필드를 선택하는 바람에
이젠 진짜로 삼선에 대한 꿈을 접어야 했습니다.
말년
하지만 이쯤 또 하나의 큰 시련이 그를 덮치게 됩니다 바로 친구가 경영하는 중계 회사에 자신의
이름을 빌려 주었다가 큰 사기를 당해 전재산을 날려먹게 된 것이죠.
한마디로 늘그막에 알거지가 된 전직 대통령 이때까지만 해도 대통령에겐 따로 연금도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율리시스는 돈을 벌어 빚을 갚기 위해 친구이자 소설가였던 마크 트웨인이
소유한 출판사와 계약을 맺고 자신의 회고록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글을 쓰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율리시스는 후두암 진단을 받게 됩니다.
암투병으로 고통스러운 상황에서도 율리시스는 회고록을 쓰는 일을 멈추지 않았는데요.
결국 책이 출판된 지 2개월 후인 1885년 7월 23일 6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죽기 직전까지 가족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쓴 회고록은 문화적으로도 좋은 평가를 받았음은 물론 당시 금액으로
50만 달러를 벌어들이며 남은 가족들에게 경제적으로 큰 도움을 주었다고 합니다.
총정리
전쟁 영웅 타고난 문장가 아내와 가족들을 지극히도 사랑한 남자 알코올 중독자 실패한 농장주,
최악의 대통령까지 한마디로 평가 내릴 수 없을 정도로 참으로 드라마틱한 삶을 살았던 율리시스 심슨 그랜트.
하지만 분명한 건 그는 전쟁을 싫어한 군인이었으며 가족들을 사랑한 자상한 가장이었고 또 흑인이나 아메리카
원주민들을 위해 노력한 대통령이었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미국 역사상 최고의 장군 중 한 명으로 꼽히는 사람
하지만 능력으로 보나 성품으로 보나 어떻게 대통령으로는 왜 그렇게 실패했을까 아쉬움이 남는 사람
미국의 제18대 대통령 율리시스 그랜트에 대해 알아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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