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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에 태어나, 일제의 많은 만행에도 꿋꿋하게 시를 써 내려갔던, 대한민국의 시인 윤동주.

그가 남긴 시들은 지친 한국국민의 마음에 따뜻한 불을 지펴주고 있습니다. 또한 그의 생애를 합께 알아보며, 그때 당시의 시대적 상황과 조선인으로서의 서러움을 함께 느끼고, 광복과, 독립에 대한 열정을 보여주시고, 한국을 사랑한 독립운동가분들에게 감사한 마음을 되새기며, 글을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오늘은 그가 살아온 28년의 짧은 생애를 함께 알아보겠습니다.

 

 

 

윤동주 시인

 

항목 내용
윤동주의 출생 1917년 12월 30일, 북간도 명동촌
윤동주의 사망 1945년 2월 16일, 일본제국 후쿠오카 후쿠오카 형무소
윤동주의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윤동주의 업적 일제강점기 속에서 한글을 지켰으며, 민족의 아픔을 시로 노래한 것.

 

 

 

 

 

 

 

 

윤동주의 어린 시절

1917년 12월 30일, 북간도 명동촌에서 윤영석과 그의 아내 김용사이에서 건강한 사내아이 하나가 태어납니다.

이아이가 우리에게 주옥같은 시를 남기고 간 시인 윤동주입니다. 첫아이를 잃고 8년 만에 얻은 아이였기에 아버지 윤영석은 크게 기뻐하며, 아이의 아명을 '해처럼 빛나라'는 뜻의 "해환"이라 지었습니다. 동주는 북간도 명도촌에서 14년을 지내며 그곳에서 감수성을 키워 나갑니다. 

 

어린 시절 함께했던 이야기. 

 1. 동주는 동갑내기 사촌 송몽규와 함께 어린 시절을 보냅니다.
 2. 동주는 어린 시절부터 기독교에 다니며, 기독교 정신을 배우며 자랐습니다.
 3. 이후 8살에 명동 소학교에 입학하여, 학문을 배우기 시작합니다.
 4. 동주의 어린 시절을 함께한 친구들은 송몽규, 김정우, 문익환이었습니다. 동주와 친구들은 모두 문학에 남다른 재능과 관심을 보였는데, 이들과 함께 자라며, 동주는 문학소년의 꿈을 키워 갔습니다.
 5. 이후 동주와 아이들은 그들이 쓴 시를 모아 '새 명동'이라는 잡을 발간할 정도로 남다른 재능을 보였다고 합니다.

 

 

 

 

 

 

 

 

윤동주의 학창 시절

이후 윤동주는 송몽규, 문익환과 함께 은진 중학교에 입학하였고, 활기찬 학창 시절을 보내게 됩니다. 웅변대회의 수상, 직접 재봉틀을 돌리기도 했으며, 축구선수, 밤에는 늦게까지 교내 잡지도 만들었습니다. 이때 동주는 역사와 한문을 가르치던 명희조 선생에게 불굴의 독립의지와 역사의식을 배우며,  그 마음을 시에 담아내기도 했습니다.

 

이후의 성장

 1. 다른 친구들이 다른 학교로 편입해 가자, 동주도 부모님을 설득해 문익환과 함께 평양 숭실중학교에 편입해 들어갑니다.
 2. 이후 숭실중 교장에 신사참배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파면을 당하자, 학생들도 공맹 자퇴를 감행했는데, 이때 문익환과 동주는 함께 자하게 됩니다.
 3. 이후 광명중학교로 다시 편입한 후 2년간 문학도의 꿈을 키워나가게 되고, 이때 많은 양의 작품을 쓰고, 5개의 동시를 내기도 했습니다.
 4. 이후 아버지와 대학입학으로 의견이 갈리게 되는데. 아버지는 동주가 의사가 되기를 원했고, 동주는 문과로 가고 싶어 했습니다. 결국 동주의 의견대로 연희전문학교에 문과로 입학하게 됩니다.
 5. 연희전문학교에서 동주는 조선어 강의와 역사, 문학강의를 들으며 문학도의 꿈을 키우면서도, 어둡고도 참담한 민족의 현실에 눈을 뜰 수 있었습니다.

 

 

 

 

 

 

 

 

 

윤동주의 마지막

이후 1941년 연희전문학교 졸업반이 된 윤동주는 그동안의 내적 방황과, 고민, 자신을 억눌렀던 역사의 무게를 시로 승화시키게 됩니다.  이 무렵 나온 시가 우리가 잘 아는 '별 헤는 밤'입니다.  이후 동주는 자신이 그동안 써놓은 시들을 모아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제목의 시집을 출판할 계획을 세웁니다. 하지만 당시 상황은 시집을 출판할 수 없었던 상황이었고, 이 계획은 미루게 됩니다. 이후 조금 더 문학을 공부하기 위해 동주는 일본 유학길에 오르게 됩니다.

 

윤동주의 사망

 1. 1943년 7월 일본에서 공부를 하고 여름방학을 맞아 고향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던 윤동주와 송몽규는 갑자기 들이닥친 일본 경찰에 의해 함께 체포됩니다. 
 2.  그 이유는 조선인 유학생들을 모아 조선의 독립과 민족문화의 수호를 선동했다는 '조선 독립운동 선동죄'라는 명목이었습니다.
 3. 그렇게 동주는 징역 2년형을 선고받고,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옥살이를 하던 중 1945년 2월 16일 새벽, 원인불명의 사인으로 갑자기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그의 나이 28세로 광복을 겨우 6개월 앞둔 시점이었습니다.
 4. 이후 아버지 윤영석이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 당숙 윤영순이 후쿠오카 형무소에 오게 됐고, 송몽규를 만나게 되었는데 그때 송몽규가 동주와 자신이 감옥에서 정체불명의 주사를 맞다가 이모양이 되었다고 증언했다고 합니다. 
 5. 이후 20일 뒤 송몽규도 함께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총정리

대한민국을 사랑했고, 한글을 사랑하여 모든 시를 한글로 만 쓴 윤동주. 아직 더 많은 꿈을 펼칠 수 있었던 28살의 윤동주는 그렇게 허무하게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모두는 이런 분들의 희생으로 광복을 맞이했다는 것을 기억하고, 감사해야겠습니다. 이 글을 읽으신 여러분 이번 광복 80주년을 기억하며, 한번 눈을 감고 감사의 마음을 전해 봅시다. 마지막은 윤동주시인의 가장 유명한 시 "서시"로 마무리하겠습니다.

 

서시

                                                                                                                         윤동주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감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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